J는 정말 예쁜 딸을 낳았다. 지보다 백배는 예뻤다. 자연분만을 하려고 이틀 밤낮을 꼬박 진통을 하다 도저히 어쩔 수 없어 제왕절개로 낳았는데, 낳고 보니 부모의 잘난 점만 꼭 집어 최고로 어여쁜 아이가 태어났다. 신기할 정도로 이목구비가 완벽했다. J가 딸을 안고 가면 누구나 한 번쯤은 뒤돌아 봤다. 나는 무슨 재주인지 진심 부러웠고, 좋은 유전자만 골라 태어난 그 딸이 장차 엄청난 미인으로 자라나리라 기대했었다. 예쁘니 자꾸 바라보게 되고, 친구 딸이지만 마음이 절로 갔다.
J는 그런 딸이 두 돌도 되기 전에 엄마에게 맡기고, 남편과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나는 친구 대신 가끔 아이를 보러 J의 친정으로 놀러 갔다. 그때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는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자라고 있었다. 자라면서 조금씩 미워질 만도 한데 더 예뻐지는 느낌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지만 얼마나 딸이 그리웠을까? 그렇게 2년쯤 흐른 후 J는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는 딸이 못내 애처로웠던지 딸을 독일로 데려갔다. 낯선 곳에서의 육아가 힘들었겠지만, 그리웠던 딸과 함께이니 마음은 편하리라 생각했다. 조금씩 독일 생활이 익숙해진다고 편지나 전화로 소식을 전해오기도 했다. 나는 J보다 꽃처럼 예쁜 그 아이가 가끔 그리웠다. 나를 이모라고 불렀는데, 내내 이모 노릇이 하고 싶었다.
그러다 그해 여름, 사고소식을 들었다. 교통사고였다. J의 동생이 독일로 놀러 가 처음으로 떠난 여행지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희생자는 J와 여동생 그리고 딸아이 세 사람이었다.
소식을 듣는 순간, 모난데 없었던 그 아이의 동그란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이제 겨우 우리나라 나이로 네 살이었고, 엄마 아빠와 산지 몇 달이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황당했고, 그러려고 그렇게 예뻤나 하는 먹먹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할머니 곁에 있었으면 무탈하게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J가 함께 데려가려고 갑자기 그런 결정을 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J를 묻을 때, 우리의 우정반지와 편지를 함께 넣어줬다. 가는 길이 외롭지 않았으면 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나도 내 아이를 낳았다. 분주하고 정신없는 세월이었는데 어느 날, J가 남긴 흔적이 내게 왔다. 우리가 고등학생일 때 ‘미래의 나에게’라는 제목의 글을 각자 제출해 타임캡슐처럼 밀봉한 적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동창회 때 타임캡슐 개봉행사가 있었고, 주인을 잃은 그 편지가 친한 친구인 내게로 전해진 것이다. 글을 보니 J는 좋은 아내와 엄마가 되기를 소망했다. 계집애, 십 대 어린 나이에 좋은 아내와 엄마가 꿈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조숙한 건지 소박한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녀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편지를 읽자 친구가 보고 싶었다. 대구로 가는 기차 안에서 J와 함께 들었던 나나무스끄리 같이 청승맞은 음색의 음악을 들었다. 대구 역에서 다시 택시로 두 시간.... J의 무덤은 대구 근교의 시집 뒷산에 있었는데 길은 험하고 멀기만 했다. 왜 내 친구가 이렇게 외지고 먼 곳에 홀로 묻혀있어야 하는지 성질이 났고, 긴 세월 친구의 죽음을 내내 외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J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대신 가끔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욕을 했다. 고작 그거 살고 갈 거면서 좋은 엄마가 되긴, 개뿔이었다.
몇 가구 되지도 않는 산골마을에 택시가 멈췄고, 나는 물어물어 산으로 올랐다. 마을을 앞으로 두고 나지막한 뒷산은 지나치게 조용해서 현실감각이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 J가 있었다. 비석도 없이 덩그마니, 내 친구의 무덤이 먼저 보였다. 그저 반가웠다. 그리고 그 옆에 여전히 자라지 못한 조그마한 아기 무덤이 눈에 들어왔다. 살아있을 때도 그렇게 예쁘더니 동그란 무덤은 티 없이 발랄하고 깨끗했다. 무덤도 귀여울 수 있었다. 주위로 나비가 날았고, 여기저기 색이 좋은 들꽃들도 보였다.
그처럼 그림 같은 모습을 보니 마음이 툭 풀어졌다. 두 개의 무덤은 아주 가까이 있었는데, 몇 걸음 떨어져 보면 서로 꼭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곳에서 둘은 평화롭겠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래서인지 친구의 인생이 더 이상 서글프게 생각되지도 않았다.
뒤돌아서는 발걸음은 올라올 때와는 달리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보러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나도 아이의 엄마라서 J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창밖이 이미 어두워진 서울행 기차에서 친구가 좋아했던 나나무스끄리 대신 조금 밝은 음악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