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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Sep 09. 2020

맡겨진 날들



외가는 한적한 동네였다. 동네 이름은 연암이었는데, 초등학교를 가운데 두고 수십 호 집들이 옹기종이 모여 있었다. 마을 옆으로는 약간 높은 지대에 남북으로 이어진 큰 국도가 나 있어 시골이라도 답답한 느낌이 전혀 없었고, 차라리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야산들은 아늑했고, 논을 가로질러 끝까지 가다 보면 꽤 깊은 수심의 개울 둑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 가본 지 사십 년이 넘었다. 중학교 때 서울로 이사 오고 가지 못했고, 외할머니가 내가 고등학교 일 학년 때 돌아가셨으니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된 것이다. 나는 할머니 장례식도 가지 않았다. 울산 연암이 서울에서 멀고, 고등학생이라는 이유로 엄마가 데려가지 않았는데, 생각해 보니 나는 갔어야 했다. 나는 할머니와 친했다. 게다가 할머니는 지금 생각해도 꿀맛 같이 달콤한 유년기의 시간을 내게 선사했다.


칠 남매를 두었고, 다들 장성해 가족을 꾸렸으므로 할머니에게는 손자 손녀가 꽤 많았다. 하지만 할머니와 함께 살아 본 손주는 내가 유일하다. 

엄마는 나를 낳고 삼 년 후 동생을 낳았는데 유독 육아를 힘들어했다.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힘에 부쳤나 보았다. 그래서 집에서 차로 한 시간쯤 떨어진 외가에 나를 맡겼는데, 그때가 내가 네 살 때쯤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다섯 살 유치원 가기 전까지 있었다. 막상 날 외가에 떼놓고 가자니 엄마는 애처로워 울먹거렸는데, 나는 택시로 돌아가는 엄마에게 뱅긋뱅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고 했다. 그게 너무 신통하고 고마웠다고 엄마는 내내 이야기해 주었다. 나도 그때의 기억이 어슴푸레 나기는 한다.     


사실 나는 외가에 있는 게 나쁘지 않았다. 집에서 보다 백배는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네에 또래의 아이들도 있었고, 놀 거리도 많았다. 게다가 할머니가 해주는 밥은 엄마가 해주는 밥보다 훨씬 맛이 있었다. 아쉬울 게 하나도 없었던 셈이다.


당시 외할머니는 동네에서 최고참 어른 축에 들었고, 지금으로 치면 짱에 가까웠다. 학교 교장으로 지내다 정년 퇴임한 외할아버지는 정구도 치고 바이올린도 켜는 멋쟁이였지만 생활력이 별로였다고 했다. 덕분에 할머니는 약간 드세질 수밖에 없었다. 박봉을 모아 논도 사고, 밭도 사고, 산도 사서 일곱 남매를 교육시켰다고 들었다. 성격도 시크한 편이어서 여느 할머니처럼 나를 물고 빨고 하면서 귀여워하지는 않았고, 어쩐지 어른처럼 대해 주었다. 

대신에 엄마로부터 나를 맡은 순간부터 무심하게 어디에나 데리고 다녔다. 그날 이후 김 교장 손녀딸인 나는 연암 동네 짱인 할머니의 껌딱지였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분주하게 움직이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할머니 뒤를 언제나 졸졸 따라다녔다.   






원래 시골마을의 아침은 유난히 상쾌한 법이다. 깨우지 않아도 저절로 눈이 떠졌고, 날마다 일찍 일어나 할머니와 산에 갔다. 외가에서 걸어서 삼십 분쯤 떨어진 곳에는 할머니 소유의 야산이 있었는데 산에는 작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산에 들어서면 먼저 나뭇가지 태우는 냄새가 코를 간지럽게 했다. 자욱하게 피어나는 냄새 좋은 연기를 뚫고 조금만 걸어가면 군 막사가 보였다. 군인들은 청소도 하고 운동도 하면서 할머니를 보면 익숙하게 인사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청년이었을 군인들은 할머니 뒤를 따라 졸망졸망 산에 오르는 나를 귀엽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들에겐 소중한 먹을거리였을 별 사탕이나 건빵을 손바닥 가득 쥐어주곤 했다. 

한적해 보이는 그곳에 왜 군 막사가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곳저곳을 살피는 할머니와 너무 멀어지지 않게 눈치를 보면서 나는 막사 주변을 뛰어다녔다. 

저만큼 마을이 보이고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입에 물고 있는 별사탕을 와자작 깨물면 달콤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그렇게 쉬엄쉬엄 산에서 내려오면 점심때였는데, 조금 있으면 동네 아이들이 놀러 왔다. 대부분 나보다는 너 댓살 위의 초등학생이었다. 걔들은 학교 갔다가 돌아오면 늘 모여 놀았는데, 마음씨 좋게 나도 끼워 주었다.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어린 나를 멀리 데려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그건 그저 하는 말이었다. 아이들을 따라 나는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매일 멀리 놀러 나갔다. 

낯선 곳이었지만 안전한 느낌이었고, 잘 모르는 아이들이었지만 순했다. 날이 더우면 아이들은 둑에서 개울로 첨벙첨벙 뛰어들어 수영을 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고 재미있어 보였다. 

나는 너무 겁이나 차마 다이빙은 못하고 혼자 둑에서 기어 내려가 아이들과 물놀이를 했다. 그러다 지치면 개구리도 잡고 메뚜기도 잡았다. 집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실컷 헤매고 다니다가 아이들이 나를 데려다주면 할머니는 걔들에게 내일부터는 너무 멀리 데리고 다니지 말라고 또 하나마나한 당부를 했다.  


할머니 손에 잡혀 하루 종일 찌든 땟구정물도 씻고, 옷도 갈아입은 후에는 할아버지 방으로 숨어 들어갔다. 거의 자신의 사랑채에서 꼼짝도 안 하는 할아버지는 나를 보면 무르팍에 앉혀 주셨다. 

그리고 앉은뱅이책상에 달려있는 서랍을 스르르 열었다. 서랍 안에는 온갖 종류의 간식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입이 짧아 점심에도 탁주 한 사발로 끼니를 때우던 할아버지는 단 것을 좋아하셨나 보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무릎에 찰싹 달라붙어 박하사탕을 빨아먹고 있으면 부엌에서는 조기 굽는 냄새가 고소하게 풍겨 왔다. 저녁밥은 언제나 꿀맛이었고, 나는 엄마도 아빠도 동생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졸렸지만 할머니를 따라 마실을 다녔다. 이 집 저 집 돌아가며 동네 여자들은 한 곳으로 모여들었는데, 이해도 되지 않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났다. 간혹 무서운 이야기도 있고 웃기는 이야기도 있었다. 중간중간 알아들을 만하면 따라 웃기도 했는데, 돌아올 때는 영락없이 깊은 잠에 곯아떨어져 할머니 등에 업혀 오곤 했다. 

할머니 등에서는 엄마와 참 비슷한 냄새가 났다. 간혹 개 짖는 소리가 컹컹 들렸고, 아무도 없는 길이었지만 무서움과는 거리가 먼 한적함만 내려앉았다. 


나는 영원히 이런 시간이 반복될 줄 알았다. 끝이라는 개념이 그때 내게는 없었다. 내일은 다시 나뭇가지 타는 냄새가 코를 간지럽게 하는 산에 갈 것이고, 아이들과 개울 둑에서 놀 것이고, 할아버지의 박하사탕을 빨아먹는 하루가 주어질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뭔가 꽉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더없이 자유롭고 만족스러웠는데 결말은 예정되어 있었다.


엄마는 내 마음도 모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데리러 왔다. 그래서 할머니와 얼떨결에 작별하고 연암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은 그러고도 한참 동안 나를 데리러 왔다고 할머니가 전해주었다. 시간이 지나고, 바쁘게 자라느라 외가도 할머니도 군부대도 아이들도 잊혔다. 


엄마에게 며칠 전 연암 외가에 대해 물어보았다. 엄마도 그때 일을 거의 다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네는 벌써 이십 년 전 개발되어 사라지고, 이제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고 씁쓸해했다. 하긴 세상이 이렇게 빨리 바뀌고 있는데,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도 할머니 집이 남아있을 때 한 번쯤 가볼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하고 사느라 이렇게 무심했을까?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것이 나를 지나 흘러가버린 느낌이다. 

그곳은 당연한 말이지만 내겐 마음의 고향이었다. 그리고 맡겨진 날들은 내 인생 가장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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