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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Sep 16. 2020

남편과 고잉 그레이

   



십 년 전쯤 남편과 나는 염색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머리 총이 세고, 숱이 빽빽한 남편은 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흰머리도 빨리 늘어 지금은 반백을 넘어서고 있다. 반면 머리카락에 힘이 없고 빈모인 나는 아직 희끗희끗한 정도에 머물고 있지만 둘의 약속은 지금껏 지켜지고 있다.      


그때 왜 우리가 앞으로 흰머리가 늘겠지만 염색은 하지 말자고 약속했는지 선명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토요일 오후였고, 무료하게 소파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만 머릿속에 남아 있다.

아마도 염색약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TV프로를 시청하고 있었을 수도 있었겠고, 둘 다 게으른 편이라 한번 염색하면 계속해야 된다는 지인의 말을 귀담아 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무심한 십 년 전 약속이 우리 커플에게는 앞으로 다가올 노화에 대한 어떤 기준 비슷한 것이 되어 버렸다.

머리 염색을 하지 않기로 한 작은 결심이 가치관으로 확대되어 이왕 이렇게 된 거 다가올 몸의 변화를 고대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편하고 순하게 늙어가기로 마음을 모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왜 지저분하게 흰머리를 내버려 두냐고 물어보는 친구들이 늘어났다. 분명 외모나 옷차림에 그리 무심한 편은 아닌 것 같은데 머리 염색을 거부하는 심리가 궁금했을 터였다.

그래서 그저 하기 싫어서 안 하고 있다고 간단하게 대답하면 다들 별거 아니네 하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대답에 대한 다음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다. 주로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이냐 하는 어이없음과 염색을 하면 그래도 지금보다는 훨씬 젊어 보일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하기야 나는 희끗희끗에 머물러 있을 뿐이지만 반백인 남편의 경우 설핏 보면 까만 머리의 시숙보다 노숙해 보일 때도 있다. 시부모님은 그런 남편의 흰머리를 볼 때마다 내내 혀를 차시더니 이제는 포기하신 듯 별말씀이 없으시다.





이처럼 호응받지 못하는 우리의 고집을 지지해 주는 몇몇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단골 미용실의 헤어디자이너이다. 젊고 스타일리시한 그는 의외로 우리 둘 다에게 염색을 권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고잉 그레이가 멋지다고 진심으로 칭찬해 주고, 나중에 자신도 나이를 더 먹게 되면 우리처럼 염색을 하지 않겠노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 친구의 격려가 분명 힘이 되기도 하지만 이따금씩 흔들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특히 오랜만의 친구 모임에 참석하게 되는 날에는 나도 깨끗하게 염색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들기 때문이다.     


살아보니 미의 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다. 아닌 줄 알았는데 살면 살수록 그렇게 느껴진다. 시선과 생각에 따라 얼마든지 간극이 생겨난다.

특히 타인이 좋아해 주는 내 모습과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이 심히 다를 경우에는 갈등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옷차림의 경우만 해도 어느 하루, 내가 엄청 세련되다고 차려입은 치마가 타인의 눈에는 후져 보일 수도 있고, 도로 집에 돌아가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들지 않는 셔츠가 그들의 눈에는 멋져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자신이 좋아하는 자신의 모습을 선택하기로 했다면 일종의 지조랄까 흔들리지 않는 작은 신념 같은 것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예뻐 보이는 나의 모습을 따라가기로 했다.     


당분간 염색은 하지 않기로 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미 아름다움에 관한 소박한 꿈이 있다. 희망하고 있는 늙은 여자의 모습이 있는 것이다.

구부정해지기 시작한 어깨를 될 수 있는 한 꼿꼿하게 펴고, 흐트러지지 않는 뒷모습을 갖고 싶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우아한 곡선을 이루는 드세지 않은 주름도 탐이 난다. 가장 바라는 한 가지는 마지막까지 반짝일 수 있는 눈빛이다.

그리고 이 모두를 다 갖진 못할지라도 살아온 만큼의 백발은 그것들과 가장 잘 어울리는 요소가 될 것이다.

다행히 같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고잉 그레이로 아름다워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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