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위해 말해야 하는 이유/ 자기표현의 꽃, 거절
저녁 강의가 있는 날이었다. 1시간 일찍 여유 있게 가서 차 한잔 마시고 있었다. 60대쯤 돼 보였다. 여자 두 분이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친한 친구 사이로 보였다. 자녀를 모두 출가시키고 친구들끼리 인생의 여유를 즐길 나이에 이야깃거리는 여행 이야기, 남편 험담, 자녀 특히 손자, 손녀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옆에 있는 친구에게 한 분이 말한다. " 이제 너도 좀 쉬어, 자식 뒷바라지할 만큼 했잖아. 자주 보고 싶어도 네가 딸네 집 가서 손녀 봐줘야 한다고 하고 사위 집에 온다고 약속을 자주 미루니까 너한테는 연락을 안 하게 돼" 하니까 딸자식이 결혼해서 아이 낳고 집 근처로 이사 와서 엄마한테 기대고 의지하는데 어떻게 안 도와주냐고 묻는다. 아이 낳아 쩔쩔매면서 전화하면 안쓰러워서 힘들어도 달려가게 된다. 친구들이랑 놀러 다니는 게 즐겁지만 자식들이 의지가 되고 허전하고 외로운 마음이 조금이나마 채워진다. 아들이 전화 와서 " 엄마 백김치 먹고 싶어 전화했어요"하면 그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전화 끊고 마트 가서 장 봐온다. 아들 불러 백김치에 따뜻한 밥상 차려 아들이 먹고 있는 모습 보면 사는 보람이 다시 느껴진다. " 자식들은 부모가 줄 수 있을 때만 좋아해. 내가 보기엔 네가 자식들에게 정을 끊지 못하는 것 같아. 너 없어도 애들은 잘 살 수 있어. 네가 도와주니까 엄마 찾는 거지. 독립해야지 언제까지 자식 뒷바라지하면서 행복해할래?"
고등학교 다니는 딸이 학교에서 신는 실내화를 밤 10시에 책가방에서 꺼내놓더니 내일 검사니까 빨아달라고 했다. 갱년기인지 며칠째 몸이 찌뿌둥하고 잠을 자도 잔 적 같지 않고 붓는 느낌이 들어 일찍 자려고 누웠는데 딸이 실내화 빨아 달라고 한다. " 네가 빨든지 가다가 하나 사서 신고 가든지 엄마는 몰라! " 했더니 딸이 짜증을 내면서 화를 냈다. 밤늦게 실내화를 꺼내놓으면서 내일 검사라서 빨아달라 하니 엄마도 화가 나긴 마찬가지다. " 진작 꺼내놓지, 응? 엄마가 무슨 네 심부름하는 가정부니? 하라 그러면 하고 말라 그러면 안 하는 사람이야?" 했더니 딸이 지지 않고 대든다. " 그러니까 미안해하면서 말했잖아! 깜빡 잊어서 지금 생각났다고 " 그러면서 실내화 빨지 않고 그냥 가면 내일 검사에 걸리고 수행평가 들어간다면서 엄마한테 수행평가 점수 안 좋으면 다 엄마 탓이라고 문을 콩 닫고 들어간다. 엄마는 수행평가 점수에 들어간다는 말에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 그래 별수 있냐? 빨아줘야지. 대학만 들어가기만 해 봐라. 아주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제 엄마를 부려 먹는다니까" 중얼중얼, 투덜투덜 하면서 밤 10시 넘어서 실내화를 빨아 탈수기로 탈수해서 방에 세워두었다. 얼른 말려야 해서 선풍기를 실내화 앞에 틀어 둔다. 스타킹에 팬티 하나 제 손으로 빨아 입는 법이 없는 딸 뒷수발을 끝내려면 대학 갈 때까지는 꾹 참아야 한다고 다짐하지만 부글부글 끓는 감정이 진정되지 않는다. 상호의존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잘못된 의사소통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 자신의 사전에서 싫다는 단어를 없애버린다. 자신의 문제, 감정, 생각에 대해 말하는 걸 꺼린다. 자신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고 믿는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 어떤지 알 때까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 않고 기다린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가 어렵다. 감정을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고 적절하게 표현하기 어렵다." 남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애쓰고 상대가 행복해할 때 함께 기쁘다. 나라는 사람의 감정,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싫다는 표현을 하거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때 상대가 실망하거나 상처 받는 걸 볼 때 자신이 상처 받는 것처럼 괴롭다. 차라리 내가 힘든 게 낫다. 분위기가 냉랭하거나 대화가 단절된 상태를 참지 못한다. 먼저 말을 걸고 사과해서 불편한 상태를 회복해야 마음이 편하다. 나 하나 불편하면 만사 오케이다. 이런 의존적인 생각 때문에 자녀에게 과도하게 신경을 쓰고 자녀 기분을 맞추려고 애쓰는 엄마들이 있다. 자녀가 성적이 올라 기분이 좋으면 인생의 보람이 느껴진다. 자녀가 친구들 문제로 우울해하고 학교 가기 싫다고 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걱정이 된다. 부모의 행불행이 자녀의 얼굴빛, 기분, 성적에 달려있다. 하루하루 행불행이 롤러코스터를 탄다. 기분 좋게 친구들 만나 차 한잔하고 여유를 되찾고 집에 돌아왔는데 문 쾅 닫고 들어가는 자녀 때문에 세상 비참한 기분이 든다. 부모가 수행평가 이야기만 하면 뭐든 들어준다는 걸 아는 자녀들은 어떻게 엄마를 움직이는지 안다. " 엄마 도움이 필요해! " 하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오는 엄마의 기쁨을 알고 있는 자녀는 결혼하고 나서도 여전히 엄마의 존재감에 기쁨을 주는 자녀로 산다. " 엄마가 해주는 백김치가 제일 맛있어! 백김치 다 먹었어?" 하면 1주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김치통에 먹기 좋게 익혀서 와서 가져가라는 전화가 온다는 걸 안다. 그 김에 찾아뵙고 밥 한 끼 먹는 게 자식들에게는 효도이다. 뭔가를 해 주면서 연결을 이어간다는 건 끝이 길지 않다. 더 이상 자식에게 줄 경제적인 도움, 맛있는 반찬, 따뜻한 온기, 손자 손녀를 돌볼 힘 등이 줄어든다면 어떻게 부모의 존재감을 느낄 것인가? 서둘러 자녀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주면서 채우는 부모의 존재감을 스스로 행복하게 채우는 연습을 해야 한다. 거절하지 못하면 자녀에게 매여 살게 된다. 독립시키고 독립해야 할 부모 인생이다.
최근 오마이뉴스에 나의 주방이야기 “ 돌 밥 돌 밥, 밥 프리 선언합니다 ” 글을 읽고 정말 공감이 갔다. 돌 밥 돌 밥은 돌아서면 밥, 돌아서면 밥의 줄임말이다. 준비하는데 몇 시간밥 먹는데 20분이면 싹 비우는 순삭이 세끼 밥하기다. 어깨 수술을 한 어머니 병문안을 간다고 하니까 “ 내가 지금 팔을 못 써서 와도 밥 못 챙겨줘, 그러니 오지 마라” 했다는 이야기다. 간편식 사 가서 함께 먹어도 되고 배달음식 시켜 먹어도 되는데 우리 세대 어머니들은 꼭 자기 손으로 따끈하게 갓 지은 밥 한상을 먹일 때 흐뭇하다. 우리가 밥 먹으려고 모이는 게 아니다. 그래서 시어머니,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면 가족 교류가 뜸해진다. 밥을 해서 모이게 하는 엄마가 없으니까, 이런 부모 밑에서 밥을 얻어먹고 자란 딸이 결혼해서 자식을 키우면 똑같이 정성스럽게 밥을 해 먹이고 싶다. 잘해 먹이려는 마음이 아님에도 밥에 연연하게 된다. 엄마가 차려준 밥상이 곧 사랑처럼 느껴져서다. “ 밥 프리선언! 밥으로 사랑을 주지 말고 사랑을 느끼도록 표현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