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말로 들어야 믿을 수 있는 상대의 진심.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끝날 무렵 석형과 민하 커플이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민하는 석형에게 "왜 저한테 고백 안 하세요?"하고 묻자 석형은 "저는 패스요"라고 급하게 덧붙인다. 석형은 "넌 내가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려고 옆도 안 보고 뒤도 안 보고 그래?"라고 묻는다.
민하는 '어쩔 수 없죠. 팔자려니 해야죠"하며 "근데 저는 좋은 사람이에요. 교수님이 지금 알고 계시는 것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니 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안심시킨다. 그러면서 민하는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죠? 저 좋아하시는 거 맞죠?'라고 다시 묻는다.
석형은 "그걸 꼭 말로 해야 하니?"라고 되물으며 "좋아해 나도 너 좋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고백해" 하면서 다가가서 포옹을 하면서 드라마가 끝난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에릭 번(Eric berne)은 TA(교류분석) 이론을 완성시킨 인물이다. 교류분석이론은 정신분석의 무의식에 근거를 두지 않고 성장할 때 성격구조에 근거한 성격이론이자 심리치료이다.
에릭 번은 이 이론에서 OK 에고그램(0K egogram)이라는 네 가지 인생 태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인생 태도는 자기 자신과 타인, 세계에 대해 갖고 있는 개인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어린 시절 경험과 초기 결정으로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네 가지 인생 태도는 자신과 타인에 대해 어떻게 대하는지에 달라 달라진다. '자기 긍정, 타인 부정', '자기부정, 타인 긍정', '자기부정, 타인 부정'.'자기 긍정, 타인 긍정'으로 나뉜다. 에릭 번에 따르면 '자기 긍정, 타인 부정'의 인생 태도를 가진 사람은 독선적이며 타인에 대해 배타적일 가능성이 높다. 타인에 대해 의심하고 타인 탓으로 원인을 자주 돌린다. ‘자기부정, 타인 긍정'의 인생 태도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행동과 생각에 대해 회의적이며 책임을 자신의 잘못으로 돌려 자책한다. 모든 일을 자신 탓으로 돌려 혼자 곱씹으며 자신이 잘못했다고 비난할 가능성이 높다. ‘자기 부정, 타인부정’ 인생태도를 가진 사람은 세상 누구도 믿지 않으며 자신의 생각도 믿지 못한다. 끝으로 자신뿐 아니라 타인, 세상과 의심 없이 협력하면서 공존하면서 서로 도울 수 있는 인생 태도는 역시 '자기 긍정, 타인 긍정'의 태도이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해서 생기는 게 아니다. '자기 긍정, 타인 긍정'의 인생 태도를 가진 사람은 어떻게 그 사람을 믿을 수 있냐고 물으면 "믿는데 이유가 있나요? 그냥 믿을 수 있어요"라고 대답한다. 사람을 믿는데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하는지 질문을 이상해한다. 자신뿐 아니라 타인, 세상이 자신을 돕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의 믿음은 땅에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것처럼 안정감있도 매사 자신 있다. 어린 시절 유년기 경험과 초기 결정을 통해 '자기 긍정, 타인 긍정'의 인생 태도가 만들어졌으며 이 태도는 평생 다른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복 받은 사람들인 셈이다.
에릭 번의 교류분석이론에 따르면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석형에게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자주 고백해 속 시원함을 선물한 민하는 '자기 긍정, 타인 긍정' 인생 태도를 가진 드라마 속 인물이다. 석형을 좋아하는 마음을 상대에게 들킬까 봐 고민하는 모습을 민하에게서 볼 수 없다. 좋아하는 마음이 생긴 자신이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석형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 거절당할까 두려워 눈치 보는 장면을 본적이 없다. 상대가 자신에게 감정이 있든 없든 숨기지 않는다. 싫은 감정도 숨길수 없듯 좋은 감정도 숨길수 없다. 누가 봐도 석형을 좋아하는 민하의 감정을 훤히 알 수 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 나쁜 게 아님은 물론 자신의 감정을 숨길 필요가 없다. 설사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좋아하는 감정 그 자체로 행복하다.
석형이 "넌 내가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려고 옆도 안 보고 뒤도 안 보고 그래?" 묻자 민하가 대답한다. "팔자려니 해야죠." 자신은 좋은 사람이고 석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니 자신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러면서 다시 묻는다.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죠? 저 좋아하는 거 맞죠?"
드라마 속 인물이지만 이 대사가 참 똑 부러지게 들린다. 민하가 가장 궁금한 건 병원이 아닌 곳에서 함께 밥 먹고 집 앞까지 데려다주러 온 석형과 어떤 관계인지 직접 말로 확인하고 싶어한다.
사람은 왜 말로 꼭 들어야 할까요? 말에는 그 사람 진심이 담겨있고 진심은 느낌으로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말로 표현하는 솔직한 고백은 그 사람의 진정성을 표현해준다. 그래서 고백이 필요하다. 고백을 듣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상대 마음속에 사랑하는 사람으로 간직되어 있는지 그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말로 꼭 들을 필요가 있다.
자신이 석형의 마음 안에 소중한 존재로 자리 잡고 있는지 묻는 민하의 당당한 요청은 참 아름답게 들린다. 자기 자신의 감정을 소중하게 여기고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만이 거리낌 없이 요구할 수 있는 당당한 자신 존재에 대한 확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긍정, 타인긍정'인 사람은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니 내가 좋아하니 당연히 상대도 나를 좋아할거라 믿는다. 믿으려고 노력하는게 아니라 당연히 좋아할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좋은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