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정하 Sep 07. 2022

그림이 건넨 '애쓰지 않는 시간'

그림을 그리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화창한 봄날, 청명한 가을 날들 중 며칠인 것 같다. 자주 오가는 산책길 가운데 아주 커다란 공터에서 매년 특전사들이 낙하산 비행 훈련을 한다. 산 정상 어디쯤에서 낙하하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먼 곳에서 낙하산이 훅하고 밀려오다가 낙하지점이 가까워지면 속도를 늦추고 동그라미를 그린다. 아주 천천히, 천천히, 힘을 빼고 땅에 내릴 준비를 한다. 바람이 살랑 부는 날엔 낙하산이 춤추는 것 같다. 어떨 땐 멀리서 낙하산이 조용히 내려앉는 장면을 감상할 때 평화로움과 고요함 그 자체를 경험한다. 무심을 몸과 마음으로 이해한 순간이다.



오랫동안 잘하고 싶어서 애쓰며 살았다. 잘하려 할수록 애를 쓰게 되고, 애를 쓸수록 만족스럽지 않았다. 잘하려고 하지 말라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다. 모든 애씀은 잘하려는 마음에서 생긴다고. 글쎄 그게 뭐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하던데 그 마음 내려놓기가 어찌나 어려운지 '그냥 하기와 애쓰지 않고 하기'가 더 어려웠다. 어떻게 힘을 빼야 하는지, 애쓰지 않고 그냥 하기 위해 또 애쓰는 격이 됐다. 나에게 책 쓰기를 목적으로 한 글쓰기는 애씀 그 자체였다. 애쓰지 않고 즐겁게 술술 써낼 수 있기를 얼마나 열망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경험하고 싶었던 '애쓰지 않는 시간(effortless time)'을 풍경스케치를 하면서 경험했다. 그림 그리기보다 반나절 투어가 목적이었다. 여럿이 어울려 스케치를 다니지만 그림은 혼자 그린다. 1시간 안에 그림 한 장을 그리는 미션이 있으니 한 눈 팔 겨를이 없다. 그리든 그리지 않든 자유의지라면 그만큼 집중하지 않을 거다. 적당한 긴장감이 있어야 집중할 수 있다. 애초에 그림에 똥 손이라 기대가 낮았던 것도 한 몫했다. 달리 비결이 있는 게 아니다. 풍경과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대로 따라 그리면 된다. 여기에 그림 선생님의 부추김이 한몫했다. "전체를 한꺼번에 그리려 하면 엄두가 나지 않아요. 벽돌 한 장부터 그리세요. 기왓장 하나 그러고 나서 하나 더 그려보세요."



정확하게 그리려 하면 애쓰게 된다. 비스므레 형태가 비슷하면 된다. 점차 그림 실력이 올라간다는 걸 직접 경험하면서 자신감이 붙었다. 그리는 스킬, 기법보다 자세히 보는 관찰이 먼저다. 직접 경험과 터득이 가장 큰 배움이다. 자세히 보고 풍경 그대로 그릴수록 그럴듯하게 그릴 수 있었다. 자세히 관찰할수록 망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실력이 모자란다는 자격지심이 줄어든다. 어느 순간 연필로 그리던 스케치를 멈추고 펜으로 밑그림을 그렸다. 그림 선생님은 연필로 그리지 말고 처음부터 펜을 사용해서 한 선으로 주욱 그려야 예쁜 선이 나온다고 했다. 내가 봐도 펜으로 직접 그린 그림의 완성도가 훨씬 있어 보였다. '애쓰지 않는 시간(effortless time)'은 나에게 그렇게 손을 내밀었다.




애쓰지 않고 뭔가를 하지 않을 때 저절로 된다는 수월함이 느껴진다. 풍경을 관찰하려고 집중하는 동안 머릿속 온갖 생각이 사라지고 없다. '직진녀'에 가까워 결과를 낼 때 짜릿함을 느끼는 성격의 소유자인 나에게 애쓰지 않고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경험은 자유로움을 선물했다. 풍경을 관찰해 작은 스케치 북에 옮기는 동안 1시간이 10분처럼 순삭 흐르는 경험은 몰입의 기쁨을 주었다.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등산용 접이 방석을 깔고 퍼질러 앉아 시선 아랑곳없이 집중하는 시간이 행복했다. 햇빛이 내리쬐는 자리에서 그림을 그릴 때 헬스장 온 것처럼 땀이 등 뒤, 앞가슴 아래로 또르르 흘러내릴 때 희열이 느껴졌다.



예전에 생일선물로 자전거를 받고 한두 해 동안 팔당대교를 넘어 양평 자전거길로 라이딩을 다닌 적이 있다. 햇빛이 많을 때는 집에서 해가 질 무렵 출발했다. 오후 5시만 해도 해가 비스듬히 따갑게 비치는 시간이다. 6시쯤 집을 나선 것 같다. 사람들이 자주 찾는 능내 기차역을 지나 길게 이어진 가로수길을 지날 때였다. 열기가 식기 시작한 늦은 오후 길게 이어진 나무 숲길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데 자연 속으로 들어가면서 내가 사라지고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든 적이 있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느낌. 살갗을 스치는 바람과 팔랑팔랑 흔들리는 녹음의 나뭇잎만 존재하고 나는 어디에도 없다는 느낌을 느낀 적이 있다. 그림 그릴 때 잠깐 그 느낌을 다시 경험했다.그 후로 스케치는 꼭 자연에서 직접 풍경을 보면서 그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헤세가 접이식 의자를 챙겨 마을 산 언덕에 나가 시간을 보낸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림이 주는 즐거움, 기쁨은 단지 그리는 행위에 있지 않음을 이제 나도 안다.



작가의 이전글 드디어 놀이를 찾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