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정하 Sep 16. 2022

사랑할수록 사랑하게 되는 풍요로움

그림을 그리다


오랫동안 인생을 자신이 가진 결핍을 채워가는 여정이라 믿고 살았다. 인생을 생성과 넘쳐남, 있는 그대로 펼치려면 먼저 채워야 한다고 믿었다. 삶의 결핍을 채워야 풍요로울 수 있다 믿고 언젠가 기쁨으로 경험할 생성과 넘쳐날 그날을 위해 살았다.

"요즘 나는 인생의 묘한 진실 혹은 비밀 하나를 알 것 같다. 그 진실이란 인생은 결핍과 고갈의 원리가 아니라, 생성과 넘쳐남의 원리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인스타에 절망은 없다'의 작가 정지우는 날마다 자신의 일상을 페북에 글로 올리고 있는데 그의 글 중 일부이다. 글 쓰는 이들이 소재의 '고갈'에 시달릴까 봐 두려워하듯, 누군가를 계속 사랑하면 곧 질려 고갈될까 주춤하듯, 한 가지 일을 하면 쉽게 지루해질까 봐 계속 다른 일을 찾듯. '결핍과 고갈'의 삶은 자주 길을 잃고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오게 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출구를 찾지 못해 계속 길을 찾아 헤매게 된다. '결핍과 고갈'은 원래 출구 없이 설계된 미로 같다.

정지우 작가는 누군가를 계속 사랑하면 곧 질려 고갈될 거라 생각하지만 오히려 제대로 사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더 사랑하게 되고 더 풍요로워지는 법이며, 그저 어느 순간부터 사랑하길 관두었기 때문에 '결핍과 고갈'이 온다고 말한다. 어떤 일을 꾸준히 하면, 권태에 빠지고 다른 일을 하고 싶은 건 그 일이 기계적으로 반복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쓰고 있다. 정말로 사랑하고 그 일로 삶을 살고 진짜로 어떤 일을 매일 한다면 그 일은 계속해서 새로운 영역을 불러오고, 얽히고설킨 수많은 경험들을 불러오고, 그 이전에는 몰랐던 디테일들에 대한 인식과 감각을 확장시켜 준다. 우리의 관심은 총량이 정해져 있어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일 자체로부터 계속 피어오른다.




개인적으로 '결핍과 고갈'의 글쓰기에서 '생성과 넘쳐남'의 그림 그리기로 다른 출구를 찾아 걸어 나오고 있는 중이다. '결핍과 고갈'의 글쓰기는 계속 내가 지닌 총량을 의심하게 했으며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기계적인 반복을 요구했다. 글쓰기를 정말로 사랑할 때 느꼈던 즐거움이 사라진 글쓰기는 글 한 줄 끄적일 마음마저 사라지게 했다. '결핍과 고갈'과 '생성과 넘쳐남'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나의 경우 '내적 기쁨, 즐거움'을 꼽고 싶다. 헤세는 소년 시절, 낚시하는 날의 즐거움과 충만한 행복감을 수채화를 그리면서 다시 느꼈다고 한다. 그림 그리기 좋은 날씨가 되면 그림 그리기 적합한 멋진 하루를 예감하게 되고, 늙어버린 가슴속에는 어린 시절 방학 때 느꼈던 즐거움의 여운이 다시 살며시 나타난다고 고백한다.

인간은 어떤 종류의 것이건 즐거움과 놀이를 만끽하고 싶어 한다. 어쩌면 '즐거움과 놀이'가 먹고사는 일, 노후를 책임질 돈, 위로해 줄 관계보다 중요한지 모르겠다. 혼자 누릴 수 있는 자신의 '즐거움과 놀이'를 모른 채 삶의 풍요로움을 어디서 찾을까 싶다. 그림 그리기는 혼자 누릴 수 있는 '즐거움과 놀이'의 기쁨에 눈을 뜨게 한다. 글쓰기의 '결핍과 고갈'에 시달리던 시간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 삶이 더 이상 기쁘지 않고 즐겁지 않다면 '결핍'의 삶에서 걸어 나와야 할 때이다.


'생성과 넘쳐남'은 감정의 느낌이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바라던 책을 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음 책을 착실히 쓰고 있지도 않다. 돈을 더 버는 것도 아니다. 미래가 지금보다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은 더 줄어들고 있다. 주변은 건강을 잃어가는 사람들 소식으로 넘쳐나고 부모님 돌봄을 책임지느라 자식들 또한 함께 죽어간다. 내가 원한다고 얻을 수 있는 행복들이 아니다. 오히려 주어지는 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일이 늘고 있다. Pain과 surffering. surffering은 pain을 받아들이지 않는 과정에서 생기는 고통이다. 대체로 pain을 고통보다 2차 고통, 이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삶의 진정한 기쁨은 의도하지 않은 곳에서 만날 가능성이 높다.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그림 그리기를 기계적으로 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정말 사랑하기 위해 '잘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다. 잘 그리기 위해 '1일 1 그림'을 하는 즉시 그리는 기쁨이 사라질지 모른다. 헤세가 느꼈던 '그림 그리는 즐거움과 충만한 행복감' 이걸로 족하다. 인생의 '생성과 넘쳐남'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어떤 종류의 것이건 즐거움과 놀이가 되려면 행위 자체가 놀이가 되어야 한다. 놀이는 즐거움과 기쁨 자체 시 결과나 성취가 아님을 이제 알겠다. 그게 제대로 사랑하게 되어 풍요로워지는 인생의 원리이다.



작가의 이전글 지독히 계획적인, 조심스러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