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쫑알쫑알 대는 사람
May 19. 2023
에이쒸 VS BDFG
막장 드라마를 1초 만에 유쾌한 시트콤으로 바꾸는 주문
“무서워.”
언젠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이른 아침 지하철에 함께 탔던 그날, 친구가 남긴 한 줄 평은 이랬다. 사회 초년생 때부터 수년간 본인의 차로 여유롭게 출근하던 친구에게 지금 내가 탄 이 지하철은 정말 무서울 만도 하다. 저 멀리 에서부터 이미 ‘꽉’ 찬 채로 나타난 지하철은 그다음역에서는 틈을 만들어내서라도 또 한 번 ‘꾸역꾸역’ 사람 태우고 달린다. 여기저기 서로 알고도 밀리고 밀고, 모르고도 밀고 밀리고. 거기에 저마다의 이유로 서로를 향한 날카로운 소리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공포영화가 따로 없다. 출근길 지하철은.
‘오늘은 그래도 어제보다는 좀 더 낫다’는 생각을 하며, 빠르게 움직여 지하철 역을 나가려던 찰나에 갑작스러운 대치 상황과 마주한다. 하나의 문에 나가려는 사람과 들어가려는 사람이 마주하는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한 상황. 내가 오른쪽으로 몸을 ‘쓱’ 움직이면, 상대방도 몸을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몸을 움직일라 치면, 상대방도 왼쪽으로 '이심전심'으로 움직여 결국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출근길을 재촉하려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 먼저 침묵을 깬 건 상대방의 앙칼진 목소리다.
“에이쒸!”
누가 들어도 잔뜩 화가 난 목소리. 아무리 바쁜 아침 출근길이라 해도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서로 눈인사 한번 나누고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지나가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나. 갑작스러운 한마디가 불쾌감에 불을 지르더니, 내면 저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공격 본능까지 일 깨울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단 1초.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이라 할지라도 도대체 어떤 대목에서 저렇게까지 불쾌해서 저런 단어가 나온 것인지 이해도 안 될뿐더러, 상쾌한 아침부터 이유 없이 욕을 먹었다는 생각에서 인지 전투력이 마구마구 샘솟는다. 오늘 아침 출근길 드라마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왜 막장으로 가는 것인지 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쾌감만 더 커지고 말았지만, 이내 들은 척도 안 하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기로 한다. 어차피 더 얼굴 붉혀 봤자,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망치는 것 외에는 얻을 것이 없기에. '쒸익 ~ 쒸익 ~' 숨을 몰아쉰 채.
보통 그렇지 않나? 출근길의 불쾌감은 또 유달리 그날 하루의 기분을 '좌지우지'하거나, 전체적으로 컨디션을 저조하게 만들 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공격의 여운으로 '잔뜩' 흥분한 채로 얘기를 쏟아내고 만다. '다다다다' 쏟아내고 털어낼 테다.
“아니~~~ 그 할아버지가 갑자기 에이쒸 하시고 인상을 팍 쓰셨다니까! 우쒸”
‘쒸익 쒸익’ 콧구멍에서 뜨거운 열이 쏟아져 나오는 느낌까지 들던 찰나, 약간의 호응의 취임새만 넣어주며 열심히 들어주던 그가 입을 열었다.
“BDFG! 할까!?”
“……”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하고 잠시 머리를 굴려보지만,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다.
“그게 모야?!”
“아니~~~ 할아버지가 에이쒸~ 하셨으니까!”
“그래서?!”
나는 속이 터지는데, 알 수 없는 문자열을 정성스럽게 말하는 그에게 슬슬 부아가 치밀기 시작한 덕분에 아침에 나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던 그 할아버지처럼 목소리가 '한껏' 앙칼져지고 말았다.
“ABCDEFG 하고 알파벳 놀이 하자는 건가 보다 하고, B, D, F, G 하자는 거지!”
“아악?!”
순간적으로 의아했지만, 결국 그의 아재 개그에 웃음이 터져버리고 만다. 단순히 아재 개그로 치부해 버리기엔 A, C 배열에 대응하는 B, D, F, G의 배열이 꽤나 규칙적이고 재치 있는 답이나 싶은 거다. 할아버지가 먼저 알파벳 순으로 A 다음에 B는 건너뛰고 C 했으니, 차례로 알파벳 하나씩은 건너뛰고 B, D, F, G 하란다. ‘에이쒸’ 하고 성을 내는 상대에게 ‘BDFG’하고 알파벳 놀이로 답하는 상황을 생각하니, 상상만 해도 막장 드라마 같던 아침 드라마가 순간 시트콤으로 바뀌어버리는 매직.
“푸항항”
참지 못하고 육성으로 웃음이 터진다. 출근길의 불쾌감이 시트콤으로 바뀐 지는 이미 오래다. 싸우자는 상대를 힘 한번 들이지 않고 쿨내 나게 이길 수 있는 주문!
좋아, 결심했어! 앞으로 '에이쒸' 하면, BDFG로 이겨버리고 말 테다!
푸항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