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의 소리

by 조이현

드디어 잉글랜드 남부 애벗즈베리에 도착했다. 런던에서 도싯으로 향하는 버스가 지연 출발한 탓에 하마터면 도싯에서 이곳으로 향하는 버스를 놓칠뻔했다. 도싯발 버스에서 바라보는 이곳 풍경은 아름다웠다. 초록색 낮은 언덕과 건너편에 보이는 푸른 바다. 간간히 서있는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건초로 만든 지붕을 얹은 집들.


애벗즈베리를 이번 휴가의 목적지로 정한 건 세 달 전에 본 백조의 호수 발레 공연 때문이었다. 우아한 발레 무용수들의 움직임, 정확한 군무, 그리고 무용수들의 그 아름다운 육체. 군살 없는 몸매와 긴 팔다리, 발레리노들의 탄탄한 허벅지 근육. 살아서 움직이는 그 모습을 보며 그 모티브가 된 백조를 실제로 보고 싶었다. 아름다운 존재로 산다는 건 어떤 걸까. 아름다움이 다른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삶을 산다는 건.


영국 어딘가에 수백 마리의 백조가 모여 산다는 잡지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났다. 몇 번의 검색 후에 런던행 비행기와 버스, 숙소를 예약해 두었다. 백조들의 쉼터, 애벗즈베리로.


평일에 찾은 애벗즈베리 스와너리는 한산했다. 산책하는 몇몇 노인들만 간간히 보일뿐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름다운 산책길을 10분쯤 걸어 백조들이 모여사는 호수 앞에 섰다.


수백 마리의 백조가 우아한 자태로 호수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어디선가 읽었던, 떠있기 위해 애쓴다던 백조 발의 존재는 느껴지지 않았다. 파란 호수, 하얀 백조, 파란 하늘, 하얀 구름.


그리고 정적이 있었다. 수백 마리의 새가 정적의 소리만을 내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침묵. 검은 백조 한 마리가 날개를 휘저으며 호숫물을 스치듯 가로지르며 날아갔다. 유달리 크게 느껴진 날개소리 조차 나의 발걸음 소리보다 작았다.


굳게 입을 다문 백조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내 발걸음 소리가 들린 걸까. 백조의 우아한 물음표 모양 고개 수백 개가 내게로 향했다. 여전히 소리는 없었다. 까만 선글라스를 낀 듯한, 눈이 보이지 않는 백조들이 내게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나는 뒷걸음질 쳤다. 견디기 어려웠다. 그렇게 먼 곳에서 찾아왔건만 백조 앞에 선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발걸음을 돌려 스와너리 출구로 향했다. 출구로 가는 길에 사료를 싣고 백조들에게 향하는 수레와 마주쳤다. 정적 속에서, 법석을 떨며 사료를 먹을 백조를 상상하니 온몸에 차가운 땀이 맺혔다.


예약해 둔 숙소로 향했다. 숙소 1층의 펍에서 피시 앤 칩스와 맥주 한잔을 받아 들고 2층의 내 방으로 향했다. 혼자 쓰기엔 너무 넓은 방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유튜브에서 백조의 호수를 검색했다. 청회색의 조명아래 백조들과 오데트, 지그프리트가 춤을 추고 있었다. 딴 따라라라 딴 따단. 유명한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흘러나왔다. 발레리나들은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무대 위를 뛰어다녔고 오데트는 지그프리트에 의해 들어 올려졌다.


음소거 버튼을 눌렀다. 무용수들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였다. 가만히 영상을 보다 주먹으로 책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무용수들의 발동작에 맞추어, 공연 내내 신경에 거슬리던 토슈즈의 소리를 떠올리면서. 악마 로트바르트와 블랙 스완들이 백조들을 헤집어놨다. 백조들이 정신없이 무대 위를 움직였다. 양손으로 쉴 새 없이 책상을 두들겼고 온몸은 땀으로 젖었다.


막이 내렸다. 식은 피시 앤 칩스를 우물우물 씹었다. 대충 겉옷을 벗고 침대 위에 누었다.


뜬금없이, 발레 공연 옆자리에 앉았던 남자의 테슬로퍼가 떠올랐다. 꽤 귀여웠는데. 런던에서 괜찮은 테슬로퍼를 살 수 있는 곳이 있는지 검색했다. 한참을 찾아보다, 양치도 하지 않은 채 피시 앤 칩스의 생선향과 기름맛을 느끼며 잠에 들었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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