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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br Oct 12. 2020

팬트리가 뭐길래

고민의 외래어

번역 3개월차. 번역대학원 입시를 실패하고 ‘난 번알못’이라며 자책의 시간을 보내다, 공부한 시간을 이대로 날리기에 억울해 맨땅에 헤딩으로 일감에 도전해서 번역으로 간신히 용돈벌이를 한 지 3개월차. 운 좋게 브랜드 호텔 프로젝트도 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아직도 너무 부족하고 노후를 생각하면 지금 이렇게 설렁설렁 용돈벌이만 해서도 안된다는 걸 알지만 아직 일을 더 늘리기엔 번역 속도가 빠른 것 같지도 않고, 중구난방으로 비딩만 해서 뽑혔다 쳐도 마감 못 지키는 불상사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뭐 지금 좀 덜 벌면 어때. 그만큼 안 쓰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산다. 번역대학원에 물론 못 들어갔지만, 안 들어가길 잘 했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위로하고 사는 것처럼. TMI를 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본론을 얘기할 때 배경을 먼저 많이 푸는 스타일이다. 결론부터 말하고 세부 내용을 붙이는 영어와 달라도 너무 다른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 것 같다. 


호텔 번역을 하다 보면 외래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고민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 누군가 가끔 어떤 단어는 영어를 썼을 때 이해가 더 빠르다는 얘기를 했던 적이 있는데 실제로 번역을 하면서 그 말을 더 체감한다. 아까 ‘팬트리(pantry)’라는 단어를 놓고 생각이 많아졌었는데, 팬트리를 그냥 쓸까 아니면 한글로 대체할 만한 더 좋은 말이 없을까 하다 결국 팬트리를 선택했다. 팬트리를 번역하면 식품 저장 공간 정도가 될 텐데, 일단 번역했을 때 영어보다 더 길어지는 것도 싫고, 팬트리라는 단어가 상당히 대중화되었다는 게 검색으로도 증명된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다소 낯선 개념이었을 이 단어가 정착한 데에는 ‘구해줘 홈즈’의 역할도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팬트리’처럼 대중화되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단어가 또 있다. 바로 ‘다이닝 누크(Dining Nook)’인데, 누크를 검색하면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아늑하게 세팅된 식탁 이미지가 나온다. 한마디로 식사 공간인데, 누크는 식사를 위한 방도 아니고, 주방 옆의 식탁도 아니다. 구석진 곳에 오로지 식사만을 위한 전용 공간의 느낌을 갖고 있는 단어이다. 하지만 사전을 찾아보지 않은 이상 누크를 아는 한국인이 몇 명이나 될까? 나도 번역을 하면서 알게 된 단어인데. 그래서 그냥 다이닝 공간 정도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 사실 음차해서 누크로 해도 되겠지만, 단어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친절하지 않은 번역이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아, 다이닝이라는 단어가 참 웃기다. 다이닝을 그냥 식사라고 하면 될 텐데 이상하리만치 호텔에서는 식사보다는 다이닝이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파인다이닝’이라는 말이 따로 있어서 다이닝이 식사보다 더 고급스럽다고 생각하는 걸까? 식사하는 걸 동사로 dine으로 말하고, 식사하는 사람을 diner라고 하는데 식사를 식사로 부르지 못하는 번역이 가끔 답답할 때가 있다.


마지막으로 잠깐 깊은 생각에 빠지게 했던 단어는 ‘grilling area’였다. TM에 등록되어 있는 걸 보니 ‘그릴 공간’이라고 되어있는 걸 일단 나는 ‘바베큐 공간’이라고 했다. 일단 여기서 또 2차 고민이 발생한다. 바베큐를 ‘바비큐’라고 할까 아니면 ‘BBQ’라고 표현할까? 그냥 바베큐라고 했다. 바비큐를 쓸 거면 BBQ가 낫다는 생각이다. 그건 마치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배우 ‘에단 호크’를 ‘이선 호크’라고 표기하는 오글거림 때문이다. 또한 그릴 공간보다 바베큐 공간라고 생각한 이유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기실(waiting room)’처럼 공간에서 하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그릴을 하는 행위가 결국 바베큐를 먹기 위함이니, 바베큐라고 명기하면 당연히 바비큐를 굽는 공간을 시각적으로 떠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근데 이런 고민을 해도 어차피 리뷰어(proofreader)가 고칠 것이므로 결과적으로는 수정된 번역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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