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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프리 yefree Nov 12. 2022

오늘 모르는 할머니에게 우산을 받았다

갑작스레 마주한 따뜻한 마음




독일과 한국의 빗방울은 성분이 다른게 틀림없다. 분명 똑같은 비인데 한국에서 맞는 비는 무언가가 서글프다. 이 정도 비면 독일에선 우산을 쓰지 않고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 모두 나처럼 다 똑같이 비를 맞으니까 서러울 게 없었다. 하지만 한국은 다르다. 조금이라도 비가 내리면 큰일이라도 난 것 같이 느껴진다.


오늘 오후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보고도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잠깐 오다 그치겠지란 안일한 생각으로 우산의 무게를 덜고 싶었다. 덕분에 나의 가방은 한 없이 가벼웠고 발걸음도 가벼웠다. 지하철에서 내려 역을 나오려는데 바깥세상이 너무 깜깜하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그랬다. 젠장, 이렇게 많이 올 줄 알았으면 어깨가 무겁더라도, 들고 다니기 귀찮더라도 집에서 챙겼어야 하는데 후회가 막심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비 오는 거리를 멍하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처럼 우산을 안 챙겨 온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어느새 누군가 데리러 와 금세 사라졌다. ‘나는 부를 사람이 있나?’ 고개를 내저었다. 애초에 서울 사람이 아니기에, 부모님도 친척도 형제도 다 다른 지역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 고향이었으면 친오빠에게 전화를 걸어 데리러 나와달라고 했을 텐데. 아무도 전화를 걸 이가 없다는 사실이 못내 씁쓸했다.


누군가 나의 처량한 표정을 보고 ‘같이 우산 쓰고 갈래요?’라고 말을 건네주길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이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어본 적이 없으니까. 우산이 없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데리러 오는 누군가가 있겠지라고 넘겨짚으며 내 갈길을 갔던 게 떠올랐다.


그때였던 것 같다. 역 입구에서 어떤 할머니가 우산을 탈탈 터시는 게 보였다. 엄청 꼼꼼히 물을 털어내시고 야무지게 우산을 정돈하시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서있었다. 그러더니 문득 나를 보더니 이 우산을 가져가라 하신다. 자기는 가방 안에 비를 막을게 하나 더 있고, 젊은 사람은 빨리 우산을 쓰고 집에 가는 게 맞다고 내 손에 우산을 쥐어주셨다. 갑작스러운 도움의 손길에 너무 당황해서 거절을 했지만 할머니는 괜찮다는 말을 남기고 급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셨다.


순간 벙쪘다. 더 이상 한국에서 타인의 호의를 기대하는 건 사치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누군가는 아무 대가도 없이 도움을 베풀어주었다. 제대로 감사인사도 못 드린 것 같아서 급하게 내려가 할머니를 붙잡았다. 너무 감사해서 저기 편의점에서 뭐라도 사드리고 싶다고 말했더니, 자기는 배부르니까 어서 집에 들어가라고 손사래를 치시며 급히 사라지셨다.


결국 우산을 받아 역을 나서는데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할머니의 따뜻함에 차갑게 얼었던 내 마음이 무장해제되는 느낌이었다. 회사에서 무시받지 않기 위해 강한 척을 해야 했던 마음,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다고만 속여야 했던 마음의 응어리가 바늘로 톡 찌르듯 둑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우산을 쓰고 길을 걷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한 일에 책임을 져야 했던 어른은 온데간데없고 그냥 괜찮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 듣고 싶었던 어린아이만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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