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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쓸 시간,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예전에 나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길을 걸었다.

내일은 또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삶이었다.

내 삶은 연결되지 않고 단절됐다.

그것도 삶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고 바로 그 순간만이 있는 시간을 꽤 오랫동안 살았다.

10년 정도 그렇게 살았으니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밤이 되면 수첩에 절망적인 글귀를 휘갈기고 쭈그리고 아무데서나 잠들었다.

지금은 그런 과거를 잊은 채 살고 있지만 

내 그림자 어디에서든 그랬던 물이 뚝뚝 떨어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에 삶이 바뀌었다.

나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그냥 결혼을 했고 춘천을 떠나왔을 뿐이다. 

사는 곳이 바뀌고 같이 사는 사람도 바뀌었다.

그건 완전히 바뀐 삶이라는 뜻인가 보다.

아이를 낳고는 아이에게 몰두했다.

아이를 키우는 일 앞에서

그전에 온 힘을 다 바쳤던 것들이 시들해졌다.

이를테면 신념 같은 것 말이다.

신념 따위 개나 줘버릴 수 있게 됐다.

왜냐면 나는 두 발을 단단히 땅에 딛게 됐고 한 생명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를 낳고는 더욱더 세상의 이슈들이 심드렁해졌다.

아니 그들이 가증스럽고 때로는 한대 치고 싶을 만큼 경멸감도 들었다.


일을 시작하자 또 다른 세상이 열렸다.

접혀있어서 보지 못했던  반쪽의 그림이 스르륵 내 앞에 열렸다.

일을 하지 않았다면 평생을 몰랐을 또 다른 세계가 내 앞에 펼쳐졌다.

그 세계는 너무도 신나는 세계였다.

솔직하고 분명하고 또 다른 곳으로 나를 인도하는 세계였다.

나는 허겁지겁 그 길을 따라갔다.

그 길을 죽 따라가면서 만난 것은 놀랍게도 나 자신이었다.

나는 내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 더 나에게 가까워졌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알게 됐다.

이제야 그걸 알게 되다니,

원하는 것도 목표하는 것도 없었다.

그딴 건 원래 없었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물론 좀 더 일찍 알았다고 해도 별 뾰족한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늘을 사는 게 이 순간이 이 찰나가 행복하다.

이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지는 10년을 하루하루 겨우 살았던 사람만이 알 것이다.


요즘은 매일 글을 쓴다.

새벽에 일어나서 쓴다. 낮에는 일하고 퇴근하면 카페로 가서 10시까지 쓴다.

그리고 또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쓴다.

다 쓰지 못할 수도 있고

쓰다가 변덕이 나고 심드렁해져서 때려치울 수도 있다.

10년 후에 또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때는 쓰면서 살았다.

하지만 이젠 아냐

글 쓰기 따위 개나 줘버리라지.


하지만 지금은 쓸 시간이고

나는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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