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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363일 노력

어려운 건 어렵게 하면 된다.

by 김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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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렇게 까지 하는게 맞을까? 이거 내가 감당할 수 있나? 너무 욕심내고 있는건가? 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 목표를 타협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10대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92년생 친구들이 수학 문제를 풀고 영어 단어를 외우며 수능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릴 때, 나는 전혀 다른 세상에 있었다. 서울의 한복판, 차가운 실습실. 내 손에는 펜 대신 잉크 묻은 종이가 쥐어져 있었다.


나는 '기능반'이었다. 전국기능경기대회 메달을 목표로 학교의 모든 명예를 짊어진 채 훈련하는 학생이다. 그곳에서의 삶은 또래 고등학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고립된 섬의 수행자에 가까웠다.


1년 365일 중 363일 등교. 거짓말 같지만 사실이다. 설날과 추석 당일, 딱 이틀을 빼고 나는 매일 학교에 갔다.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방학도 주말도 없이 실습실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교실이 아닌 실습실을 청소하고, 어제 그렸던 도면을 들고 다시 복기 한다.


내 전공은 메카트로닉스였다. 중학교 시절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게임과 만화에 몰두하며 살았다. 그나마 지금까지도 이건 잘했다고 생각한건 바로 '큐브'이다. 3x3x3으로 돌리면서 맞추는거 말이다. 큐브를 맞추기 위해 공식을 외우고 수십, 수천번을 돌려가며 눈감고도 맞출 수 있을 경지에 이르렀고 매주 정기 모임에 나가 어른들과 소풍을 즐겼다.


그렇게 보내기를 3년, 고등학교를 선택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담임선생님은 내가 로봇을 좋아하니 공고를 추천했다. (당시 로봇동아리를 들었는데 조립과 프로그램을 입력하는 활동이였다) 부모님도 공부에 대한 기대심은 없었는지 큰 저항감은 없으셨고 공고를 들어가기로 했다.


그때의 심정을 난 잊지 못한다. 지금까지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난 고등학교에 들어가 '이러면 안돼..'라고 생각했다. 1~2주 흘렀을까? 잘 생각나진 않지만 여느때 처럼 교실에 앉아 있는데 쉬는시간 한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와 '기능반'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고 그 기회를 붙잡기로 했다.


'S사에 입사하고 싶은사람?'이 말 한마디에 기계설계와 CAD를 배우며 수천 번 도면을 그리고 0.01mm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세계. 그 정교한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나는 내 청춘을 실습실에 쏟아부었다.


친구들이 축제를 즐길 때 나는 설계 프로그램의 수치와 싸웠다. 솔직히 말하면 힘들었다. 도면을 검도 받을 땐 나의 도면으로 물건을 만들면 손해가 장난이 아니였다. 부담감이 상당했다.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내 몸에 새겨진 철학 하나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어려운 건 원래 어렵게 하는 것이다."


스트레스는 어려운걸 쉽게하려고 할 떄, 남들에게 바보 소리 듣고 싶지 않을 때, 내가 뒤쳐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을 때,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할 때 받는 것 같다.






난 고등학교 때 묵묵히 시간을 쏟아붓는 법을 배웠다. 남과 비교하면 끝도 없이 비참해진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나은 도면을 그리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버팀목 이었다.


그 지독한 독기는 결과로 증명됐다. 실업공고 기능대회 금상, 지방기능경기대회 금메달, 그리고 마침내 전국기능경기대회 동메달. 그 메달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었다. 학교에선 종목별로 대회를 나가는데 우리 학교는 메달 하나가 모자라 기능탑을 세울 수 없었다. 내 메달은 그 업적을 이룰 수 있는 메달 이였다. 그리고 내가 간절히 원했던 스무살의 나를 대기업 S사의 문턱 너머로 데려다준 강력한 티켓이었다.


고졸이라는 신분으로 S사에 입사했을 때, 세상은 다 내 것 같았다.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다는 안도감과 남들보다 빨리 사회에 자리를 잡았다는 자부심.


야생에서 내 기술 하나로 세상을 증명하던 그 짜릿함. 남이 정해준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라, 내가 직접 설계하고 내가 직접 핸들을 쥐는 삶. 울타리 안은 따뜻했지만, 나는 내가 점점 야성을 잃어가는 것만 같아 초조해졌다.


지금 내가 새벽 1시에 컴퓨터 앞에 앉아 마케팅을 공부하는 힘은 바로 그 실습실에서 나왔다. 나는 항상 어렵고 포기하고 싶을 때, 생각한다. '이게 기능반 시절 보다 힘들까?' 군대도 이 생각으로 버텼다.


전단지를 돌리며 발로 뛰던 부동산 시절에도 나는 좌절하지 않았다. '1년에 이틀 쉬던 그때보다 지금이 더 힘들까?'


어려우면 그냥 어렵게 나아가면 된다. 쉽게 하려고 하니까 고통스러운 거다. 4억이라는 부채도, 세 아이를 키우는 가장의 무게도 나는 '기능반의 마음'으로 마주한다. 도면이 복잡하면 다시보면 되고, 그래도 모르면 원인을 찾을 때까지 고민하면 된다.


나의 10대는 나에게 메달보다 값진 '끈기'를 남겨주었다. 그리고 그 끈기는 4억 빚을 행동으로 바꾸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보니 나름 거창하고 탄탄대로 일 것 같지만 그 화려한 메달과 대기업 입사의 기쁨도 잠시였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추락'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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