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존감 보고서
어렸을 적 나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내가 입사한 회사는 소위 초일류 대기업이었고 내가 속한 파트는 그중에서도 본사 경영기획실이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일류였던 적이 없는 나에게 일류 직장이 주는 만족감은 굉장했던 것 같다.
대기업 기획실 직원이라는 사회적 정체성에 심취해 어느덧 나는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남들과 다른 인생을 살 것이며, 남들처럼 아등바등하며 살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살고 있었다.
난 이때 스스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학벌 좋은 동료들, 능력 있는 주변 사람들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며 꽤 자 주 나에게 몰려들던 열등감, 패배감, 불안감은 외면한 채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확히 표현하자면 대기업 직원이라는 사회적 정체성의 만족도가 떨어질수록 나는 점점 더 괴로워져 갔 다. 나는 대단한 사람인데 회사에 안주하는 자신이 못마땅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 월급으로 언제 부자가 될 거야?”
“내가 지금 이 돈 벌려고 이 회사를 다니는 거야?”
“회사 때려치우고 사업해야 돈다운 돈 만져보는 거 아냐?”
모든 것이 불만스럽고 직장생활은 점점 답답해져 갔다. 당시 우 리나라에서 연봉을 가장 많이 주는 회사를 다니면서도 말이다.
그 당시 나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해서만 살았고 “돈은 나 그 자체”였 다. 내가 얼마 버는지, 남들은 얼마 버는지 비교하는 데 많은 시간 을 보냈다. 나보다 적게 버는 사람을 보면 행복해졌으며 나보다 많이 버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나고 우울해졌다. 돈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으면 찾을수록 비교는 심해지고 감정의 기복은 심해져 갔다.
“나만 불행한 거 같아…”
난 대단한 사람이고 자존감도 높은 사람인데 왜 이렇게 불행한 것 같지? 내 인생은 갈피를 못 잡고 그냥 불안정하게 여기저기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혼란스러웠다.
내 인생은 갈피를 못 잡고 그냥 불안정하게 여기저기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어떤 스님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법륜스님이었다. 법륜스님은 자존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 보통 좋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 는데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자신을 좋게 평가하는 것을 넘어 과대평가한다고 한다.
어? 뭐지? 보통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게 아닌가? 법륜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자신을 과대 평가하여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환상의 모습과 현실의 모습 사이의 괴리감이 생기는 데, 이 괴리감이 커지면 커질수록 괴로움도 커진다는 얘기다. 자신이 만든 환상 속의 나는 대단한 사람인데 현실의 나는 초라하고 별 볼 일 없고 인정도 못 받으니 현실의 내 모습을 점점 미워하게 되고 못마땅하여 보기 싫어진다는 것이다.
아…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바로 스스로를 과대평가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진짜의 나”로 산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놓은 “환상 속 의 나”를 이루기 위해 “위선과 허상의 나”로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환상 속의 나”가 현실화되지 않으니 모든 것이 불만족스럽고 괴롭고 방황하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탐낸, 남들 보기에 아주 폼 나고 그럴듯한 “환상 속의 나” 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현실화하지 못하는 자신을 학대하고 자학 하며 자책하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현실의 모든 것이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알고 보니 나는 그저 욕망과 탐욕, 과시로 만들어진 “환상 속의 나”만 좇는 불나방이었다.
진정한 나를 마주하지 못하고 외면한 채 살아가는, 탐욕스럽지 만 용기 없고 자존감 낮은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내가 처음 마주한, 진정한 민낯의 내 내면은 그렇게 일그러진 채 나를 보며 비웃고 있었다.
“몰랐어? 너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야.”
당황스러웠고 깊은 좌절감과 패배감이 느껴졌다. 세상에서 가장 못난 사람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긴 시간 동안 아무것도 못 하고 그저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용기를 냈다. 그동안 마주할 용기가 없어 피하던 진정한 민낯의 내 내면에게 담담하게 고백한 것이다.
“그래… 내가 그렇게 대단하고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 이제 알아… 오히려 평범하거나 조금 못난 존재라는 거, 이제 알아…”
그리고 나는 있는 그대로 내 모습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 난 그냥 이 정도인 사람이구나. 근데 이것도 나쁘지는 않네…”하고 말이다.
그때부터 내 마음은 조금씩 편안해졌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남들이 볼 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