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내만 보면 미안하다.
서울에서 제주도로 내려오기 전 아내는 제주도에 대한 생각이 전혀없었다. 아내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첫발령을 서울로 받은 완벽한 서울 사람이다. 지난 이야기이지만 아내는 처음 나를 만날 때 내가 대전사람이라고 은근히 무시도 했다. 느리다는 둥, 말을 돌려한다는 둥, 심지어 충청도는 에스컬레이터도 느리다는 둥 (사실 충청도 사람이 제일 빠르다. 박찬호, 박세리 모두 충청도 사람이다.) 아내는 서울에서 백화점 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모르는 브랜드가 하나도 없었다. 강남, 신촌, 이대거리, 홍대거리를 다니며 행복해 했던 사람……. 그런 사람에게 제주도에 내려가서 마당있는 곳에서 잡초나 뽑으며 살자고 했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아내가 3월 1일자로 교류발령이 났다. 이제는 파견도 아닌 빼도 박도 못하는 완벽한 제주도 교사이다. 나는 어쩌다 운이 좋아 서울교사가 되었지만 아내는 정말 서울에서 교사를 하려고 얼마나 공부했는지 익히 들어 잘 안다. (참~~ 독하다.) 이러니 내가 얼마나 미안하겠는가? 그놈의 제주도가 뭐라고 제주도병에 걸려서...(이건 약도 없다.)
요즘 나는 아내가 하자고 하면 무조건 따른다. 절대 토를 달지 않는다. 아내 얼굴이 조금이라도 어두워 보이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괜찮아?"
하며 눈치보기에 바쁘다.
그래서인지 요즘 아내는 행복하다는 말을 한다. 지금까지 인생중에 지금이 가장 좋다고 한다. 그런 말을 할 때면 나는 조금이나마 미안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여보 서울에서랑 정말 많이 변한 것 알아? 서울에서는 얼마나 날카로운지 무슨 말 하면 싸우려고 들었다니까? 제주도 오더니 사람 많이 변했어."
"미안해서 그러지."
내가 멋적어하며 이렇게 말하면 아내에게 돌아오는 말
"앞으로도 쭈욱~ 미안해하며 살아."
아내는 서울사람 맞다. 나처럼 절대 말을 돌려하지 않는다. 가끔 제주도에 놀러오는 지인들이
"야, 너 많이 변했다. 뒷방 늙은이 다 됐네."
라고 놀릴 때마다 스물스물 옛날의 성격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래도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제주도에서 살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않던 아내가 남편을 위해 이렇게 제주도에서 발령받고 살게 되었으니 난 참 결혼 잘 했다.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고 언제까지 아내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할지……. 나보다 아내가 제주도를 더 좋아하는 날이 온다면 미안한 마음이 사라지려나? 하지만 그것도 어려운 일이다. 나보다 제주도를 더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나만큼 행복한 제주라이프를 누리는 성산 사는 동생이 내 이런 고민을 한 번에 덜어주는 말을 했다.
"미안하긴요. 형님 덕에 형수님이 제주도 사시는 건데요."
맞다. 모두 내 덕이다. 우리는 지금 제주도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