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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개그맨 김진수를 아시나요?

내게는 너무 먼 당신, 그림(drawing)

by JJ teacher

나는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가장 부럽다.

브런치 작가님들 중에 글과 함께 일러스트를 올리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 능력이 부러울 뿐이다.


벌써 20년 정도 된 일이지만 교대를 다니던 시절, 서양 미술 과목을 이수해야 했다. (교육대학교에서는 서양 미술, 동양 미술 다 배운다.) 고등학교를 남고를 나왔던 까닭에 나는 내 미술 실력에 대하여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남고생들 미술 실력은 모두 거기서 거기! 한 두 명 빼고는 모두 못 그린다. 잘 그리는 남고생이 이상한 거다. 하지만 대학교 전체 인원의 90%가 여대생이었던 교육대학교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난 그때 확실히 알았다.

내 그림 실력은 최악이라는 것을,

그리고 여자들은 그림에 관해 대부분 기본은 한다는 것을.


교대를 다닐 때 첫 서양미술 시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첫 시간은 데생이었다.

교수님께서 '아그리파'를 그리라며 조각상을 교탁에 올리셨다. 나는 자신있게 슥슥 그림을 그려 나갔다.

그런데.... 그런데.... !!

내 생각과는 다르게 아그리파의 얼굴이 이상했다. 지우고 다시 그려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이 문제일까?'

고민하던 그때, 지나가며 내 그림을 본 여학우가 큰 소리로 말했다.


푸하하! 너 왜 김진수를 그려?

아그리파와 김진수, 좀 닮지 않았나요?

혹시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던 개그맨 김진수를 기억하고 있는가? 이윤석과 함께 '허리케인블루'라는 팀을 결성해서 외국팝을 립씽크하던..... 그 여학우의 말에 미술실에 있던 모든 여대생들이 내 그림을 둘러쌌다. 그리고는 모두 깔깔대며 웃어댔다. 고대 로마 제국의 위대한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던 아그리파를 김진수로 둔갑시킨 나도 잘한 것은 없지만,

그렇게 나는...... 미술실에서 공개처형 당했다.


현직에 나와서도 그림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었다. 초등학교는 국어, 수학부터 미술, 체육, 음악, 실과까지 담임 교사가 가르쳐야 하기에 어느 정도 기본은 해야 한다.

"얘들아, 그림이란 말이야. 이렇게 그리는 거야."

라고 말하기에는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다. 겨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잘 그린 작품들 자료를 수집해서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그림 잘 그려요?"

라는 아이들의 질문을 받으면 여지없이 대학 시절 '김진수'에 대한 악몽이 되살아났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3년 전, 제주시내를 걷다가 우연히 한 건물의 커다란 간판을 발견했다.

창조의 아침!

간판을 보는 순간 갑자기 아침마다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창조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바로 미술학원 문을 열고 들어섰다.

"상담 좀 하려고요."

내 말에 원장님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자녀분이 몇 학년이지요?"

나는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배우려고요."

입시 미술학원에 웬 아저씨가 찾아와서 미술을 배우겠다고 하니 원장님이 얼마나 난감하셨을 지 짐작이 된다. 그렇게 나는 미술학원에 등록해서 중학생들 틈에서 연필 잡는 방법부터 배웠다. 젊은 강사 선생님들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아저씨가 불편하다고 모두 나를 거부해서 나는 원장님 직강을 들어야 했다. 학원생들은 나 빼고 모두 그림을 잘 그렸다. 나는 중학생 교실 뒤편에서 이젤 하나 놓고 눈칫밥을 먹으며 그렇게 그림을 배웠다. 나는 매일 학원에 갔는데, 주말에는 수강료를 더 내고 1:1 원장님 특강을 들으며 무려 3개월의 시간을 버텼다. 더 배우고 싶었지만 입시생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만 두었다.


그래서 아침마다 대단한 것을 창조했냐고?

3개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녔기 때문에 그림 실력은 조금 나아진 듯하다.

하지만 그림을 배우며 나는 깨달았다.

사람은 다 자기가 잘하는 분야가 따로 있다는 것을,

나는 역시 그림은 아니라는 것을.

대신 3개월이라는 시간 덕분에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것이

조금은 나아졌다는 것에 만족한다.


그리고......

더 이상 아그리파 대신

김진수는 그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설마....!

미술학원에 다니며 원장님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그림들. 인정한다, 이것이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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