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손님을 맞이한다는 것
제주도로 이주해온 사람들이 제주살이의 어려움을 이야기할 때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이 '손님치레'이다. 친한 사람들이 제주도로 여행을 와서 연락을 하는 것은 그러려니 하는데
'이 사람이 나랑 친했었나? 아닌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갑자기 제주도에 와서 연락을 할 때면 참 혼란스럽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제주도에 예고없이 와서 처음 보는 일행과 함께 다짜고짜 집으로 찾아오려고 한다. 그러면 아내와 나는 급하게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 마트에 가서 흑돼지(제주도에 오는 육지손님들은 검은털을 꼭 확인한다.)를 사야하고, 술을 준비하고, 회까지 떠온다. 그 사람들은 도착해서는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데 나와의 친분을 일행에게 과시한다. 그리고는 제주도 맛집은 어디인지, 여행 동선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볼만한 곳은 어디인지, 호텔은 어디가 좋은지 등을 물어본다. 우리 부부는 육지에서 제주도까지 온 손님을 차마 매몰차게 대하지 못하고 성심성의껏 응대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갈 때 전화 한 통화 없이 올라가고, 그 후로는 연락이 없다는 것이다.
얼마전에 브런치에 '나는 프로 손절러가 되고 싶다'라는 글을 썼다. 그냥 담백하게 고백의 형태로 쓴 글인데 오늘 확인해 보니 라이킷이 30개 가까이 달리고 많은 독자들이 공감을 했다. 심지어 나의 인간관계에 대하여
"제발 그러지마."
라며 비판하던 아내마저 그 글에 대해서는
"글 좋더라."
라며 정말 오랜만에 인정을 했다. 모두들 인간관계에 힘든 모양이다.
https://brunch.co.kr/@5c88599d157244a/24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제주도에 내려와 우리 가족을 피곤하게 하고 돌아가면 그때마다 정말 다시 한 번 느낀다.
"아직도 손절해야할 사람들이 남아있구나!"
서울에서 10년 후배 교사가 내려왔다. 이 친구는 내가 서울에서 체육부장으로 일할 때 나와 동학년에, 계원이었던 까마득한 후배이다. 그 엄혹했던 시기, 나는 이 친구 덕분에 큰 위안을 얻었다. 내가 야근을 할 때면 할 일이 있지 않아도 함께 기다려주고, 휴일에 학교에서 일하고 있으면 학교에 찾아와 간식을 놓고 갔다. 퇴근 후 함께 마셨던 맥주만도 얼마인지 헤아릴 수가 없다. 내가 서울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에도 이 친구와 이른 퇴근을 하고 비오는 창밖을 보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정말 잊을 수 없는 눈물의 맥주였다.)
나는 이 친구를 '쫄보 김선생'이라고 부른다. 정말 이 친구는 뼛속 깊은 곳까지 공무원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다. 이 친구는
"형님, '속담에 돌다리도 두드리며 가라.'라는 말이 있잖아요. 전 그말이 이해가 안돼요. 두드리지 말고 돌아가면 되잖아요. 그게 더 안전해요."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거나 융통성있는 업무처리 방법을 알려주면
"공무원이 이래도 되는 거 맞아요? 정도를 가야지."
라며 10년 선배교사를 타이르기도 한다. 또 어찌나 효자인지
"우리 아빠한테 물어봐야 하는데..."
라는 말도 자주 한다. 나도 뼛속 교사라고 생각했는데 이 친구를 보면 내가 날라리 선생처럼 느껴진다. 나는 정말로 의심이 간다. 혹시 이 친구 부모님께서 호적신고를 10년후에 하신 것은 아닌지, 아무리봐도 동갑같다. 내가 제주도에 내려오자 이 친구는 매년 정기적으로 나를 보러 왔다. 연휴가 낀 주말이면 여지없이 내려왔는데, 제주도를 여행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닌 그냥 내가 보고 싶어서였다. 제주도에 여행을 와서 괜히 친한 척하며 편의를 얻으려는 사람들과는 달랐다. 심지어 재워준다고 해도 굳이 사양을 하며 근처 호텔을 잡아 자고 갔다.
"형님, 오늘 저랑 호텔에서 같이 자요. 오랜만에 자유를 누리셔야지."
하는 배려깊은 멘트까지 남기곤 했다. 그래서인지 이 친구가 오는 것은 기다려진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닌 여자친구와 함께 왔다. 여자친구와 단둘이 있고 싶은 마음일텐데 시간을 내어 집까지 찾아와준 것을 보니 고마운 마음이 든다. 쫄보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의리는 있다.
제주도에 내려오니 사람과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길게 이어질 인연은 절대 요란하지 않다.
상대방과의 친분을 남에게 과시하지 않는다.
상대에게 어떠한 댓가도 바라지 않는다.
그냥 그 사람을 만난 것이 반갑고 좋을 뿐이다.
사람들은 다 안다.
이 사람이 진국인지 아닌지.
내 사람인지 아닌지......
제주도에 내려오니 손절해야할 사람과, 인연을 계속 이어가야하는 사람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좋다. 오늘 다시 한 번 휴대폰 연락처 목록을 살펴봐야겠다. 연락처 목록을 최대한 가볍게 만드는 것, 그것이 내 인간관계의 지향점이다.
서울에서 힘들게 직장생활을 할 때 술에 취해 그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이 학교에 와서 얻어가는 것은 너뿐이구나."
그러자 이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너무 소박하신 것 같은데요?"
아니다.
무엇보다 큰 것을 얻었다.
서울에서 온 쫄보 김선생은 지금 제주도에서 신나게 여행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