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바보, 딸바부팅이, 딸멍충이 이야기
"딸, 아빠와 너처럼 사는 딸과 아빠가 또 있을까?"
딸에게 아침밥을 차려주고 밥을 먹고 있는 딸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가끔 딸과 나의 모습을 돌아보면 신기할 때가 많다. 제주도에 넓은 집 놔두고 서울 좁디좁은 오피스텔에서 왜 단 둘이 지내고 있는지...... 직장에 다니며 딸아이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학교에 데려다 주고 데리고 오고, 레슨 데려다 주고 데리고 오고, 하루종일 대기하고.....! 내 시간의 전부를 딸아이 하나만 바라보며 쓰고 있으니 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된 것인지 신기하고 회의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 생각한다.
"세상 어느 아빠가 딸과 이렇게 많은 시간을 가깝게 지낼 수 있을까? 행복한 거지."
중학생이 되면서 사춘기가 찾아와서 예전만큼 아빠의 껌딱지도 아니고 말도 쌀쌀맞게 해서 상처를 주지만 딸아이는 무슨 일이 있으면 아직도 아빠부터 찾는다. 중학교 첫 영어시험을 망쳤다고 쉬는 시간에 울며 전화하는 사람도 아빠고, 예중에 합격했을 때 펑펑 울며 가장 먼저 전화했던 사람도 아빠였다. 친구와 노는 것이 더 좋고 집에 오면 친구랑 통화하고 톡하기 바빠서 나하고는 대화도 하지 않지만, 딸은 아직도 잠이 안 오면 슬그머니 내려와 내 팔을 베고 잠이 든다. 그런 딸을 바라보면 마냥 행복하니 나는 그냥 딸바보, 딸바부팅이, 딸멍충이 그 자체다. 40대에 교사를 은퇴하고 글을 쓰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사는 것이 내 버킷리스트였는데 그 말이 쏙 들어간 지도 오래되었다. 딸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아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때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일찍 승진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많았고 돈을 많이 벌고 싶기도 했다. 잘하고 싶은 것도 많아 3년을 넘게 퇴근후에는 영어회화 학원에 다니기도 했고, 배드민턴에 빠져 각종 장비를 구입하고 레슨을 받으며 투자도 했다. 멀쩡히 다니던 서울의 직장을 그만두고 제주도에 내려간 것도 아내나 아이들의 바람이 아닌 순전한 나의 욕심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먼저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나는 딸아이가 잘 되는 것과 가족이 행복하게 사는 것 외에는 별 다른 욕심이 없다. 가야금을 하는 딸아이가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고 싶다. 악기가 필요할 때 악기를 사줄 수 있는 아빠여야 하고, 레슨비 걱정 없이 딸아이가 레슨을 받을 수 있도록 돈을 내주는 아빠여야 한다. 교사를 은퇴해 글 쓰며 살고 싶다는 내 바람은 미루어져도, 아니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다.
혹여 누군가는 자식 하나만을 바라보며 사는 나를 어리석다고 할 지 모른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다. 분명한 것은 8평의 작은 복층 오피스텔에서 딸아와이 단둘이 보내는 지금의 순간이 딸이 성인이 되어 내 품을 떠나갈 때면 사무치게 그리울테니까.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슬퍼할 것이 뻔할테니까 지금의 이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려 한다. 그리고 딸아이가 꿈을 이루는 데 내가 필요하다면,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족하다.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나밖에 몰랐는데...... 이제야 내가 철이 들어가나 보다.
지금도 딸아이 연습실 앞에서 대기중이다.
그래, 이 순간도 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