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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섬세 Aug 18. 2021

여성의 날에

여성이 적지 않은 회사에 꿈꾸던직업, 스물아홉 주니어로입사했다

입사를 했다. 재작년 한국을 떠나 근 2년이 되지 않았는데 타국에서 새 직업을 갖게 되었다. 한국 나이로는 이미 서른이 지났지만, 나의 서른은 해외에서 내가 꿈꾸던 삶을 살아보리라 다짐했던 꿈이 현실이 되었다. 오퍼를 받던 순간부터 인터뷰를 보고 계약서에 사인하던 순간까지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렇게 크게 벅차지 않았다. 의외였다. 동네방네 자랑했어야 마땅할 일이지만 가족에게 각자 따로 좋은 소식을 알리고,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전하면서 나는 차분해졌다. 그보다 더 행복했던 날은 아이러니하게도 회사에서 여성의 날 인터뷰를 하던 날이었다.


입사한 회사는 현지 회사다. 이 지부의 여성 아티스트가 다 모이는 날. 하루 종일 기대했던 인터뷰였지만, 바라던 인터뷰라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적지 않은 인원에 살짝 묻어가려고 했던 마음을 여성 고용주께서는 꼭 집어서 걸음마를 시작한 나한테도 질문을 던져주셨다. '남자가 많은 회사를 다녀봤습니다... 너는 여자라서 쟤가 일을 못하지만 너를 위로 올려줄 수는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따위의 말이 입 안에 맴돌았지만 하지 않았다. 할 얘기는 산더미였지만, 차마 '일 잘하는 한국 출신'에 '남녀차별 선진국' 따위의 이름표를 붙여주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아직 주니어라서 일까. 고민했지만 결국 입에서 맴돌던 말을 가슴에 꾹꾹 묻었다.



설명이 길지만 나는 미대 입시를 보고 들어간 디자인 베이스의 영상학과, 영화과를 나왔다. 영화과에서 내가 하고자 했던 거의 모든 작업들을 5~6년이 지난 뒤 지금은 동기와 선후배들이 필드에서 피, 땀, 눈물 흘려가며 선보이고 있다. 미술 부심, 영화 부심이 대단해서 한동안 그 만족감에 취해 다녔던 시간을 기억한다. 아주 작은 성취에도 기뻐하며 우려먹을 수 있을 때까지 우려먹을 때쯤, 현실을 보았다. 


한 현장에서 감독에게 한참 깨지고 현직이라는 조명 선배는 '야, 어차피 여기 영상과 중에 여자들은 미감(미술감독) 밖에 못 돼'라며 조감독과 담배를 피우며 크게 웃는 것이다. 미술감독이 비웃을 직업도 아닐뿐더러 여자한테 깨진 게 참 불편했던 모양이다. 어느 날에는 누구보다 더 일 잘하던 언니가 출마는 꿈도 꾸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다. 학회장 · 부학회장은 남자만 가능하다며 30년 전통을 들먹였던 선배들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들 중 누구도 지금 잘 나가는 사람은 없다. 반대로 각자 본인의 강점을 살려 여자 프로듀서와 각 분야의 감독들은 유명한 시상식에 이름 올리며 아티스트로 필모그래피를 잘 쌓아나가고 있다.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가를 필요는 없지만, 내가 살아온 세상에서는 그랬다.


'여자는 안 돼, 못 해'를 수천번도 더 들었던 것 같다. 필드에서 유리천장을 깨고 성공한 분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대단하고 자랑스럽고 가슴이 뛴다. 이런 연대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영화를 꿈꾸다 박봉과 성희롱에 지쳐서 지레 포기했다. 제작을 떠날 수 없어 언시를 공부하다 방송을 만들게 되었다. 방송가에 가니 더했다. 좋은 공기업에 갔더니 모두가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배려가 좋았지만 계약직은 모두가 여성이고 정규직은 95%가 남자였다.


나는 운 좋게 좋은 집에서 자랐다. 여성이어서 안된다는 말은 10대에 들은 적이 없었다. 엄마는 내가 천장을 모르길 바랐고 알아도 잘 헤쳐나갈 성격이라 굳이 알려주지 않았다. 20대에 마주한 장벽은 거대한 괴물들이 뭉쳐서 불을 뿜고 있는 요새 같았다. 남초 회사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취업 때는 그 벽을 더 크게 느낄 수 있었다. 면접 2차 스터디에서 만난 남자들은 나를 여자여서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어진 3사 면접 중 한 회사는 취미에 마라톤팀에 소속되어 있고 주말에 배드민턴을 친다고 했는데 '팀으로 하는 스포츠 동아리는 안 해봤죠?' 하면서 꼭 축구나 야구를 원하길래 '기숙학원에 있을 때 축구팀 골키퍼였습니다' 했더니 '여자가 무슨 축구야~면접이라서 장난치는 거죠?' 하던 걸 기억한다. 그 사람은 유명 시사프로그램에서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피디였다.


참다 참다 폭발한 건 회사에서였다. 인사이동 시기에 일은 일대로 많이 받고 사고는 사고대로 친 남자 동료의 실수를 내가 수습하고 있을 때였다. 팀장이 옆에서, '아니 쟤는 이제 결혼하잖아. 쟤는 가장이고 너는 여자잖아.' 문맥을 읽을 수 없어 물었다. '네?' '아니, 내가 너를 위로 올리고 싶은데, 넌 여자라서 안돼... 쟤가 순서상 먼저지. 남잔데.' 동료인데도 사고를 너무 많이 쳐서 매일 내 야근을 만들고 있는 놈을 위로 올린다는 소리였다. 기가 차서 웃다가 어이가 없어서, '저도 가장인데요.' 했더니 '야, 너는 결혼하면 애 낳고 쉴 거잖아.'라는 거다. 팀장은 딩크족이었다. 아니, 어디서 커뮤니티에서나 볼 법한 글을 내가 지금 당하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타국에서의 커리어 첫 줄을 쓰게 만들어 준 회사는 여성 대표, 여성 슈퍼바이저가 많은 회사다. 행복하게도 더 부드럽고 강인하게, 섬세하게 사람을 대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이가 없는 말과 질문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게 가장 행복하다. 적어도 그런 말을 꺼내면 사회의 질타와 그룹에서 아웃될 것을 알고 있는 지성인들이 모여있음을 안다. 나이가 들어서 리더의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겸손 그리고 사람됨이 리더를 만듦을 안다. 여성의 날 질문지 메일을 받고 든 생각은 '이런 회사로 오게 되어서 다행이다.' 


이 직업을 꿈꾸게 된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지만, 유학 후 이민을 꿈꾸게 한 가장 큰 목표는 하나였다.


나의 후 세대 여자아이들이 제한 없는 꿈을 꿀 수 있는 세상에 일조하고 싶다. 


굳이 여자로 한정 짓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여자아이들이라고 한 이유는 아직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줄곧 배워왔다. 내가 나의 한계를 규정 지으며 살게 되었던 것은 지속적으로 노출된 성차별적 언어들과 환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이다. 흔히 아랍을 보며 아랍을 봐라, 한국에서 태어난 너는 행복한 줄 알라고 하지만 그건 큰 착각이다. 나는 한국에서 여자로 태어나서 행복하지 않았고, 불행했다. 항상 딸을 낳고 싶었는데, 나는 그 딸에게 같은 세상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일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다. 꿈꾸는 직업을 갖게 되었지만, 아직 첫발일 뿐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 제한 없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다양한 분야에서 누군가는 계속 나아가고 있어야 소녀도 꿈을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안다. 수많은 여성이 노력해서 내가 겪은 성차별이 그들에 비해 적었던 것처럼, 내 후세대도 역시 우리의 작은 발걸음과 시작들이 힘이 될 것을 믿는다.


여자는 서른이면~이라는 말이 있다. 나에게 적용시켜보자면 그렇다. 

여자는 서른에 새로운 도전도 망설이지 않는다. 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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