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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씨 Nov 21. 2021

1년에 1번 얼굴 비추는 일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 쉽게 가면 안 될까





단체 체벌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책상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짝꿍 J의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주된 건 성당에서의 썸이었고 중간중간 본인의 허벅지가 너무 두껍다는 '귀여운 투정'이 섞여  있었다. (누구 허벅지가 더 두껍냐를 경쟁하기도 한 거 같다)




적고 보니,  특별할 것 없는 그런 얘기를 두고,  열다섯의 나는 체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배가 아프도록 웃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무슨 잘못으로 벌을 받고 있었는지, 누가 그 벌을 주었는지는, 내 기억에 없다.  그저 즐거웠던 한순간이었다.  당시의 나는 그야말 비판 의식이란 1도 찾아  수 없는 뇌가 순수한 아이였던 거다.



코로나 시국으로 통 못 보던 친구와 은사님을 오랜만에 만났다. 그 친구를 보니,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몰랐던 그 에피소드가 툭 튀어나왔다. 나는 신나게 그 추억을 풀어냈다.



 주인공인 J도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기억의 초점은 조금 달랐지만. 그 친구는 웃으면서 "아, 기억 나. 맞아. 맞아... 그때 선생님이 벌주셨잖아요.(웃음)"




그렇게 내 기억 속에 없던 선생님이 등장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계시던 은사님께선 본인은 절대로 아이들에게 체벌을 하지 않았노라며 단언을 했다.





한참 후, C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각이었다. 이직을 앞두고, 하필 마지막 출근날 약속이 잡힌 탓이었다.





C의 등장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근황 얘기로 이어졌고, 그녀는 기분 좋은 소식을 전했다.  무려 5차에 걸친 관문을 다 통과하고  이직에 성공하게 됐다는.




언제였을까.  내가 힘들다고,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한 적이 있다. 아마 그 친구는 기억 못 하겠지만 그때 그 친구가

책 한 권을 알려주면서 읽어보라고 했다. 그리고 그건 꽤 내게 위로가 됐다. 그 후부터 나는 그 아이에 대해선 한없이 후한 편인데, 이 말을 하는 건  잘 되는 게, 싫은 사람,  그리고 그보단 강도는 약하지만 불편한 사람이 있는데, 그 친구는 모두 해당되지  않는 걸 밝히고 싶어서다. 나는 왜 굳이 안 밝혀도 되는 걸  밝힐까. 암튼 그런 나는 또 선을 넘고 다.  "몇 년 전엔 G사 면접 보더니, 아씨 멋있어. 같이 사진 좀 찍자, 프사에 인증 좀 하게" 내가 한 말은 진심이다.





그녀는 본인이 1차를 쏘겠다고 했다. 메뉴판을 유심히 보던 은사님은 스테이크를 주문했고, 제일 비싼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저 흐뭇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스테이크는 참 달았다.






그렇게 맥주와 와인을 홀짝이다 보니 1차가 끝났고, 2차로 넘어갔다. 2차는 진저에일이었다. 그리고 늘 그랬듯 2차는 은사님께서 계산하셨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리는 이자카야였다.




 나는 집이 같은 방향인 은사님과 지하철에 올라,  좀 더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은사님은  "1년에 한 번 보는 게 쉽지가 않아요. 이렇게 나오는 건 대단한 거예요. 1년에 한 번은 봅시다."라는 말을 남기고 먼저 내리셨다.






몇 정거장을 더 가야 하는 나는 그 말에 대해 생각해봤다.  왜 1년에 한 번 얼굴 비추는 일이 대단한 일이 된 걸까.  한때 서로의 흑역사를 공유하는 게 그 어느 것보다 즐거운 일이었던 사이가, 어느 시점부터 어느 회사 다니는지, 결혼은 했는지, 했다면 남편은 뭐 하는 사람인 지, 사는 곳은 어느 지역이며 주거형태는... 그런 것들에 관심을 쏟는 시시한 어른이 돼 버린 걸까. 




그런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모이는 거라면, 누군가는  불편함을 아니 느낄 수 없을 텐데.  그런 불편한 상황을  피하지 않는 걸까. 왜.






그날 내가 뱉을 말들을 복기해봤다.




아우슈비츠 얘기에 나는 부다페스트에서 난생처음 밟을 떵 에피소드를 방출했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센터를 둘러보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영하 40도였거든요. 진짜 추웠는데,  운동화를 통해 따뜻함이 서서히 전해지는 거예요, 기분 나쁜 물컹거림을 동반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는데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행인의 웃음을 머금곤 저한테  I am sorry... 전 부다페스트 하면 떵만  생각나요."






언제까지 회사 생활할지 모른다는 말엔, "전 나이 들면 동남아 30만 원짜리 렌트해서 적게 쓰고 살려고요, 지방에도 30만 원 월세 있다고 하니... 그렇게 생각하면  좀 마음이 편해져요"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건, 선뜻 축하한다는 말이 안 나오는 누군가의 자랑이 이어진다면 또는 누군가의 기쁜 소식에 진심으로 기뻐해 줄 수 없는 순간이 온다면, 혹은 나의 기쁜 소식에 시큰둥한 반응이 느껴진다면 나도 언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겠구나, 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은사님이 남긴 그 한 마디가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그냥 1년에 한 번 나가는 모임에 얼굴 비출 수 있게 꼬인 마음 그때그때 잘 펴고, 나라도 나포함 누군가 불편할 수 있는 질문은 피해야겠다. 잘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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