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땡감이 영그는 시간
토요일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려는데 찬물이 나오지 않았다. 펄펄 끓는 온수만 나오니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우리 집만의 문제인지 우리 건물 전체의 문제인지 알아야 했다.
창밖을 보니 윗집 아저씨, 렁보 씨가 건물 입구 쪽에서 자전거를 수리하고 있었다. 창을 열고 물어보려다 신발을 신었다. 창공에 대고 소리쳐 광고할 만한 불어 발음이 아니다.
내 그림자가 렁보 씨 머리 위로 쏟아지자 그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안녕하세요, 렁보 씨, 오늘 찬물이 안 나온다는 공지가 있었나요?”
“왜요? 찬물이 안 나와요?”
“네, 뜨거운 물만 나와요.”
“저희는 문제없던데.”
“그럼 저희 집만 그런가 보군요.”
토요일이라 대부분 일을 안 할 텐데 어디로 연락해야 하나 머리가 복잡해졌다.
“제가 함 봐 드릴게요.”
렁보 씨가 공구함에서 공구를 고르면서 말했다. 건물 문제인지 우리 집 문제인지만 확인하려던 건데 선뜻 도와준다고 하다니.
프랑스가 좋은 이유(그리 많지 않지만) 중 하나가 바로 사람들의 이런 여유로운 성품이다. 길에서 모르는 사람끼리도 눈이 마주치면 밝게 인사하고, 미소짓고, 쉽게 양보하고 누구든 기꺼이 도우려는 사람들의 너그러움을 경험할 때면 타국에 사는 외로움이 위로받는 달까?
렁보 씨는 건물 안 복도로 들어서자마자 입구 왼쪽 벽에 있는 여러 개의 문 중, “물”이라고 쓰여 있는 문을 드라이버로 열었다. 안쪽에는 파이프와 밸브가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그는 우리 집 파이프를 찾아 밸브를 파이프와 일직선이 되도록 돌렸다.
“수도가 잠겨있었네요. 아침 일찍 빈 옆집을 점검하러 수리기사가 왔었는데, 그때 잘못 잠그고 갔나 봐요. 가서 물이 나오나 틀어보실래요?”
화장실로 가서 수도꼭지를 열자 문제없이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다시 렁보 씨에게로 갔다.
“잘 나와요!. 정말 감사합니다. 변기 물도 안 채워져서 난감했거든요.”
“해결돼서 다행입니다.”
이분은 어떻게 이런 걸 잘 알까, 신기했다.
기욤이 떠올랐다. 기욤도 이런 걸 할 수 있을까?
그동안 집에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기면 나는 바로 배관공을 불러 해결하곤 했었다. 기욤이 바빠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냥 못할 거로 생각해서 그랬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여하튼 일반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이제는 화장실도 하나고, 주방 개수대도 하나라 배관공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도 힘들고, 30분당 기본 20유로쯤 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나는 문을 닫으려는 렁보 씨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방금 하신 것 좀 가르쳐 주시겠어요? 다음번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제가 해야 해서요.”
렁보 씨는 다행히 남편에 관한 질문 등 내가 불편할 만한 말을 하지 않고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마친 그가 문을 닫으려 할 때 또 궁금한 게 떠올랐다.
“죄송한데, 이 문은 어떻게 여셨어요? 손잡이도 없는데... 따로 공구가 필요한가요?”
“이런 드라이버가 있으면 편한 데 없으면 집에 있는 나이프로 열 수도 있어요.”
“잠시만요. 나이프 좀 가져와 볼게요.”
나는 부엌으로 가서 과도와 스테이크용 나이프를 들고 뛰어나왔다. 벽 문을 여는 걸 연습해 보는데 나이프로는 잘 안 되었다.
“이걸로는 안되네요. 이 드라이버는 어디에서 사셨어요?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내가 핸드폰의 카메라를 켜자 렁보 씨가 드라이버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이거 가지세요. 전 하나 더 있어요.”
“아니에요! 그냥 사진만 좀 찍어서….”
“진짜 더 있어요. 괜찮으니 받으세요.”
나는 얼결에 드라이버를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집에 문제 생기면 언제든 편하게 말씀하세요. 이런 건 힘든 일도 아니니까.”
수첩에 적기까지 하는 내가 절박해 보였나 보다. 예전 같았으면 고마우면서도 내가 불쌍해 보였나 싶어 마음이 상했을 텐데, 지금은 아니다. 동정이건 뭐건 삶에 도움 된다면 난 이제 뭐든 받을 준비가 되어있다. 타국에서 혼자 어린 아들을 데리고 살아야 하는 지금, 특히 지출을 최소화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거저거 따질 수는 없다.
“옆집에 세입자가 들어오려나 봐요?”
“네, 점검하러 오는 거 보니 그런 것 같네요.”
“곧 이 건물이 꽉 차겠어요.”
“좋은 이웃이 이사 오길 바랍시다.”
렁보 씨가 검지와 중지를 꼬아 보이며 말했다.
그가 간 후 집에 들어와 열심히 유튜브를 검색해 보았다. 예전에 싱크대가 새고, 변기가 막히고, 세탁기가 멈췄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인데, 이런 것들도 전문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유튜브를 보며 한참 머리를 쥐어뜯다 내린 결론은... 내 능력으로는 쉽지 않겠다는 현실적인 판단과 애초에 고장을 내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이었다.
능력이 부족하니 미리 조심해서 문제를 원천 봉쇄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에디가 물건을 조금만 거칠게 다루면 예민해져서 혼내게 되는 폐단이 생겼다. 예전에는 크게 문제 되지 않았던 에디의 행동이 별안간 심각한 문제 행동이 되어버린 것이다. 변기 버튼을 세게 누른다든지, 세탁기 버튼을 쓸데없이 돌린다든지, 수도꼭지를 주먹으로 끄는 에디를 보면 나는 예전보다 훨씬 더 강도 높게 훈육했고, 거리에서 공구를 들고 있는 사람만 보면 은밀히 다가가 뭐 하는지 지켜보다가, 내게도 필요한 것- 이를테면, 스노타이어 장착이랄지, 배터리 점퍼 케이블 연결 같은 것-을 보면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묻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에카는 그런 나를 보고 생기지도 않은 일을 미리 끌어다 걱정하는 건 세계 제일이라는 둥 약 올렸지만, 일이 생기면 언제든 필립을 부르라는 말로 날뛰는 내 불안을 잠재워 주었다.
지금으로선 새로운 남자를 만날 생각이 전혀 없지만, 만약에 맘이 바뀌어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나는 가정과 가족을 최고로 중시하는 배관공을 만날 것이다.
*
오랜만에 모에카와 집에서 차를 마시기로 했는데 윗집이 어수선하다. 비어있던 렁보 씨 옆집에 새로운 세입자가 이사하는 날인가 보다. 이삿짐 나르는 사람들을 피해 건물로 들어온 모에카의 표정이 영 별로다.
“너 앞으로 고생 좀 하겠다.”
창밖으로 스무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트럭에서 짐을 내리는 게 보인다. 이십 대 초반의 청년 열댓 명과 오십 대로 추정되는 중년이 예닐곱 명. 작정한 듯 큰 소리로 떠들며 짐을 옮기는데, 뭐가 그리 신났는지 춤추고 노래 부르다 깔깔대고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거실에 앉아 차를 마시는데 머리 위에서 수십 개의 구둣발이 저벅거리는 통에 골이 다 울렸다. 모에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쟤들도 좀 쫓아내 봐. 네 능력을 보여줘.”
나는 모에카를 향해 눈을 흘겼다. 정말이지 모에카는 날 놀리는 재미로 사는 사람같다.
“뭐래, 진짜.”
“K는 결국 이사 갔더라. 그렇게 순식간에 보내버리다니. 역시, 민, 너의 능력은 늘 상상을 초월해.”
그렇다. K는 이사 갔다. 나에게 오만가지 저주를 퍼부으면서.
K의 집에서 차를 마신 지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밖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괴성에 가까운 소리였다. 저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울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아닌지 확인해야 했다. 테라스 의자를 밟고 올라가 울타리 너머를 살펴보았다.
공교롭게도 소리의 근원지는 맞은편 건물 1층, K의 테라스였다. 자세히 보니 루이가 알몸으로 테라스 통창을 두드리며 열어 달라고 악쓰고 있었다. 미치려면 혼자나 미치지 왜 자꾸 아이의 옷을 벗겨 가학적으로 학대하는지, 이번엔 그냥 넘길 수 없어서 바로 경찰에 신고해 버렸다.
경찰차가 도착해서 K의 집에 들어가는 걸 보고 안심했는데, 얼마 후 우리 집 벨이 울렸다. 인터폰으로 누구냐고 물으려다 멈추었다. 택배가 아니라면 올 사람이 없는데 난 주문한 물건이 없었다. 한 짓이 있어서 문을 열기 조심스러웠다. 중요한 우편물이라면 메모를 놓고 갈 것이고, 외판원이라면 문을 열어줄 필요가 없고, K라면 굳이 만날 이유가 없으니 그냥 조용히 아무도 없는 척했다.
벨이 다섯 번 정도 울렸을 때, 밖에서 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집에 있는 거 다 안다, 당장 문 열어라, 네까짓 게 뭔데 경찰에 신고하고 지랄이냐 등의 소리가 들리기에 방으로 들어가 귀마개를 했다. 미친 여자의 말은 경청하는 게 아니니까.
침대에 누워 책을 읽으면서 K가 미친 여자일까, 신기(神氣)가 있는 여자일까 곰곰이 따져보았다. 신기가 없다면 수십 가구가 모여 사는 이 레지던스에서 신고한 사람이 나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고 저렇게 난동을 부리나 싶다가 그녀가 날 놀이 파트너로 선택했던 것이 떠올랐고, 그렇게 사람 볼 줄 모르는 여자라면 신기가 있을 리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녀는 그냥 미친 여자고, 가장 만만한 나한테 화풀이-내가 범인이 맞긴 하지만-를 하는 것뿐이니, 마주치더라도 순진한 얼굴로 생사람 잡지 마라, 오리발 내밀면 그만이었다.
이렇게 철저히 분석하고 계획을 세웠지만, 길길이 날뛰는 상대를 굳이 만날 필요는 없으니 우선 피하기로 했다. 모에카에게 전화를 걸어 미친 여자가 문밖에서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에디를 대신 픽업해 달라고 부탁했다. 내 얘기를 경청하던 모에카는 깔깔 웃으며 어지간히도 번잡하게 산다며 나를 약 올렸다. 에디까지 맡기고 나니 맘이 더 편안해졌다.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 순간 루이가 떠올랐다. 나는 이렇게 귀 막고 방에 숨어버리면 그만인데 숨을 곳도 피할 곳도 없는 그 아이는 이제 어쩌나, 괜히 K를 자극한 것이 아닐까, 아이를 보호하려고 한 일인데 오히려 이 일로 루이가 더 힘들어지는 건 아닌가 마음이 복잡했다.
“기욤은 가끔 만나?”
모에카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만날 일이 뭐가 있어.”
“주말에는 에디가 기욤한테 간다며?”
“매주는 아니고.”
“그때도 안 만나?”
“에디가 혼자 나가고 들어와서 볼일 없어.”
“기욤 진짜 화났나 보네.”
“......”
“아무 사이 아니라 하고, 믿어달라고 하는데 그냥 한 번 봐주면 어때?”
어제 본 유튜브 방송이 떠오른다. 내 속을 귀신같이 꿰뚫은 구글이 내가 클릭할 수밖에 없는 영상으로 나를 인도했는데, <사립 탐정이 경고하는 불륜의 징후>라는 제목의 영상이었다. 그 사립 탐정은 스무 개의 징후를 나열하면서 이 중에 한두 항목에 해당한다면 걱정할 필요 없지만 다섯 개가 넘어가면 그건 분명히 바람이라고 말했다.
스무 개의 징후는 다음과 같다.
당신이 느낄 정도로 습관이 변했다. (x)
아침 일찍 출발하여 밤늦게 돌아온다. (o)
출장을 많이 간다. (o)
종종 가족 행사에 불참한다. (o)
직장에서 과도하게 야근한다. (o)
설명할 수 없는 비용을 지출한다. (x)
비밀 계정을 여럿 가지고 있다(인스타그램, 이메일) (x, 없는 것 같은데 확실치 않음.)
신용 카드 청구서를 숨긴다. (x)
외모에 공들인다. (x)
다른 사람의 향수 냄새가 난다. (x)
당신이 본 적 없는 선물을 산다. (x)
차 안에서 콘돔 같은 설명할 수 없는 물건이 나온다. (x)
체육관에 등록한다. (x)
모르는 번호로 걸려 온 부재중 전화에 다시 전화를 건다. (o)
암호 또는 비밀 문자를 보낸다. (x)
섹스를 점점 멀리한다. (x)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다. (x)
거짓말을 한다. (o, 전 애인과 만난 걸 말하지 않았다.)
화를 잘 낸다. (x)
갑작스러운 방문을 싫어한다. (x)
세어보니 기욤은 여섯 개쯤 해당했다. 신문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오늘의 운세>만큼이나 덧없어 보이는 이런 정보를 뭘 신뢰하나 싶으면서도 애매한 경계선에 걸쳐 있는 게 은근히 신경 쓰였다.
집을 박차고 나올 때는 이쯤에서 끝내는 게 맞는다는 확신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에디가 아빠를 그리워할수록 나 혼자 우겨서 결혼생활을 끝내는 게 맞는지 헷갈린다.
나의 마음을 눈치챈 모에카는 틈날 때마다 기욤에 관해 물으며 내 고민을 더욱 부추겼다.
“이사하고 딱 한 번 왔던 거야. 요새는 연락도 없어.”
“뭐야? 말투가 서운한 거 같은데?”
“아닌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그럼, 남자 한 번 만나 볼래? 그러다 보면 기욤에 대한 마음이 정확해질지도 모르잖아.”
“뭐래? 미쳤구나?”
“왜? 이혼했다며? 헤어졌는데 뭐 어때?”
“만나고 싶어도 남자가 없다.”
“사실 너에 대해 꼬치꼬치 묻는 남자가 있어. 사이트에 올린 투어 사진 보고 연락했다면서 네 개인 연락처를 묻더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날 놀리는 재미로 사는 모에카가 또 나를 골리려는 게 틀림없다.
“재미없거든?”
“농담 아니고, 진짜야.”
“됐어. 진짜든 가짜든 안 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누가, 무슨 이유로 그러는 건지 궁금하긴 하다. 내 표정을 관찰하는 모에카를 보니 또 놀릴 시동을 거는 것 같다.
“관심 없는 사람 표정이 아닌데?”
그저 궁금할 뿐인데 입꼬리는 왜 올라가는지 모르겠다.
“또 생사람 잡는다.”
“내가 미리 이것저것 알아봤는데, 그 남자 신분도 확실하고, 무엇보다도….”
모에카가 다시 말을 시작했을 때, 위층에서 천장을 부술 듯한 굉음이 들렸다. 무언가 아주 무거운 걸 떨어뜨린 모양이다. 소리에 놀란 모에카와 나는 말을 멈추고 위층에 귀를 기울였다. 몇 초 후, 다시 깔깔대는 소리와 함께 구둣발 소리가 왁자하게 들려왔다.
“앞날이 두렵다.”
“아까 얘기하던 남자 말이야...”
“그만하셔.”
쑥스러워서 그냥 그만하라고 한 거였는데, 모에카는 삐죽이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한 번 더 말하면 못 이기는 척 시키는 대로 하려고 했는데... 백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를 너무 쉽게 날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