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날들의 기록

마르지 않는 이야기

by 화정

하루는 느리지만 한 달은 빠르게 지난다는 말을 종종 하게 된다.

월화수목 금요일은 비슷하게 흘러가고 주말을 맞아 늦잠을 몇 번 자고 나면 새로운 달이 기다리고 있다. 아침마다 같은 시간에 알람이 울리고, 집을 나서면 매번 타는 버스를 타고 정류장에 내리면 사무실의 같은 자리에서 일과를 시작한다. 퇴근을 하고, 저녁을 먹고, 잠들기까지 루틴이라고 부르는 프로세스에 따라 일정하게 한 주를 보낸다. 비슷한 리듬으로 이어지는 일상은 안정적으로 느껴지면서도 어딘가 새로움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매월 말이 되면 휴대폰을 열어 그달의 흔적을 살펴본다. 이번 주도 바쁘기만 한 것 같았는데 한 주가 아니라 한 달, 6개월을 돌아보니 제법 다채로운 활동이 쌓여 있었다. 수개월간 읽은 책, 참가한 모임과 수업, 주말에 들른 전시회, 그리고 매일 조각처럼 써 둔 글까지… 이렇게 모아 두고 보니, 지나올 때는 몰랐던 것들이 모자이크처럼 다양하고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다. 특히 사진은 생생한 기록이 담겨있는데, 이번 달에는 유독 음식 사진이 주를 이루었다. 식단 조절을 시작하면서 평소에 먹는 메뉴를 새롭게 구성하고 바꾸고 있는 중이어서 자연스레 사진으로 저장해 두고 있다. 체력이 떨어지면 잘 챙겨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식단과 양에 신경을 쓰는 편이다. 쌓여있는 사진을 보면서 자연스레 이달의 나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다.


어떤 달의 기록은 사진보다 글이 더 많았다. 이렇게까지 자주 쓸 수 있을까 싶었는데 매일 쓰는 습관을 들이니 무엇이든 끄집어내서 쓰게 되었다. 다 같이 글을 쓰는 모임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정이 지나기 전으로 데드라인을 정해두었더니, 하루 종일 무의식적으로 그날의 쓰기 소재를 찾고 있었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으면 '이렇게 써볼까?' 싶어 두세 줄 정도를 메시지 창에 써 둔다. 그렇게 한 줄에 불과한 처음의 아이디어를 붙들고, 저녁에 2~3시간에 걸쳐 글 한편으로 이어서 쓴다. 처음엔 매일 무언가를 쓴다는 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한 달을 동일한 패턴으로 지냈더니 꼬박꼬박 글감을 찾을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매일 수천 개의 글쓰기 아이디어가 지나간다. 좋은 작가들은 그중에서 대여섯 개의 아이디어를 얻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오슨 스콧 카드


이전에는 몰랐다. 새롭거나 강렬한 경험이 있을 때라야 기록해 두었다. 그런데 연습이 안 되어있을 뿐이란 걸 매일을 쓰기를 하고서 깨닫는다. 마음먹기에 따라 일주일을 그냥 흘러 보낼 수도 있고, 하루에 한 번 기록을 남기며 쓰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새로운 일을 기다리지 않고, 새로운 눈으로 오늘을 관찰하기로 한 것이다. 쓰기는 하루하루 그날의 온도와 습도가 다르듯이 비슷한 가운데 작은 변화들을 알아차리는 연습이 되었다.

그리고 자주 쓰면 좋은 점은 일상이 풍성해진다. 지나칠 만한 순간을 포착해서 글로 옮기다 보면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지고, 그렇게 내 안에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발견할 수 있게 해 준다.


꼬박꼬박 쓴 일기를 다시 훑어본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생각 기록이다.

예전에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짜릿한 자극이 없는 하루는 심심하다고 느꼈다.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찾아 추천 검색으로 나오는 트렌디한 장소를 찾아가고, 사진을 찍으며 이벤트를 만들려고 일부러 시간을 내었다. 가끔은 색다른 곳을 쫓는 재미도 있지만, 이제는 일상이라 부르는 평범한 날들을 야무지게 담아두는 방법을 찾는다. 매일을 채우는 시간과 공간이 내 삶의 중심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을 기록하며, 특별한 것 없어도 감사하고 소중한 일상을 천천히 곱씹으며 바라본다.


글은 아무것도 아닌 날들의 기록이다. 하루를 마치고 조용한 방 안에서 그날을 마무리하는 의식이다. 그래서 현재에 있게 한다. 지금 이 자리가 나의 전부라고 알려 준다. 영적 지도자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조언처럼, 쓰는 순간에 쓰는 일 외엔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엔 무엇을 쓸지 몰라도 떠오르는 대로 한 줄을 적는다. 꼬리를 물고 한 문장씩 이어나가며, 우리에게 떠오르는 수천 가지 생각이 수천 가지 글감이 된다. 삶이 흐르는 동안 소소하고 소중한 나의 이야기도 마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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