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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슴뿔 Apr 29. 2022

독서일기-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 몰랐나. 안안심 할머니의 그림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이 책은 순천의 할머니 스무 명이 평생학습관 초등반에서 글과 그림을 배우며 쓴 그림일기를 엮은 책이다. 전쟁통에 가족을 하나씩 잃고 팔려가듯 모르는 지역에 가서 처음보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줄줄이 딸을 낳았다고 구박 받고, 장애 아들을 낳았다고 쫒겨나고, 남편은 바람피고 때리고, 가난으로 굶주리고 도망다닌 사연들이 짧은 문장으로 꾹꾹 눌러 쓰여져있다.

 난생처음 처음 그림이라는 것을 그려보며, 그 떨리고 긴장된 마음들이 눌러쓴 글씨에 고스라니 담겨있다. 설레는 마음이 귀엽고 잘쓰려 애쓰는 마음이 또 슬펐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 몰랐나. 78세 안안심 할머니의 일기








-할머니기억1


나는 바닷가 여자들을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해녀들을 좋아하는데 내가 아는 제주 해녀들은 모두 억척스럽고 생활력이 강하다. 제주에서 영어 과외를 해주던 학생의 어머니가 동네의 가장 젊은 해녀였다. 집에서 혼자 빈둥거리는 내가 안되어 보였는지(아니면 탐탁찮았는지) 고사리 꺾기나 톳손질, 소라따기 등 내가 할 만한 활동이 있으면 종종 데리고 갔었는데 갈때마다 나는 괜히 부아가 치밀어 돌아오곤 했다. 영감님들은 놀고 먹고 할머니들만 죽어라 일하는 장면 때문이다. 그나마 좀 거드는 영감님은 할머니가 물질할 때 짐을 들어 주거나 밭일하러 가면 모셔다 주는 정도이고 나머지는 마을 어귀 모여서 막걸리나 마시며 노닥거렸다. 그나마도 있으면 다행인게 나이든 해녀 삼춘들은 혼자인 경우가 더 많다. 할아버지에 대해 물으면 아무런 애도도 신세 한탄도 없이 담백하게 답한다. '영감은 진작에 술쳐먹다 뒤졌어'라고. 쿨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알콜중독으로 시설에 있거나 시설에서 죽거나 아니면 배타다 실종되었거나 했다)

 뙤약볕에 밭일을 하다가도 술을 한잔씩 걸치는데 꼭 미지근한 소주나 막걸리를 주문해서 대단하고 멋있다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찬 소주를 마시면 이가 시려서라고 한다.)

 술 한 잔에 풀어내는 옛날 일을 듣다보면 삶이 왜 그렇게 고통스럽고 희생적이어야 하는지 되려 내가 억울하고 분해서 우는데, 할머니들은 그 모진 세월을 '에효' 하는 가벼운 한숨 한번에 날려버리고 다시 밭으로 돌아가 하루를 마무리 했다.





-할머니기억2


내 할머니가 생각난다. 정확히 말하면 내 친할머니가 아니라 아빠의 큰어머니와 작은어머니이다.

아빠의 큰집은 경상북도 칠곡이라는 곳이었다. 어릴땐 명절마다 이 곳을 찾았는데 집 밖에 뒷간과 정지(부엌의 경상도사투리)가 있고 아궁이를 떼서 난방을 하는 아주아주 시골집이었다.

 마을 복판 큰집에는 큰할머니가 계셨고 걸어서 20분쯤 떨어진 변두리에 작은할머니가 살고 계셨다. 두 분은 같은 서방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큰할머니가 본처이고 작은할머니가 첩인 셈이었다.


긴머리를 한 올도 빠짐 없이 고이 모아 쪽을 지고 늘 정갈한 한복차림을 하고 있던 큰할머니는 강직하고 엄격한 성격이었다. 공정하고 영민한 분이셨는데 작은할머니한테 만큼은 좋게 말하는 법이 없어 사정을 모르는 어린 나는 큰할머니가 성격이 아주 고약하다 생각했다. 작은 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았고 우리가 놀러가면 종류별로 만들어 놓은 강정을 매번 한 움큼씩 싸주셨다. 무서운 큰할머니보단 다정한 작은할머니가 좋아서 사촌들이랑 작은집에 자주 놀러갔는데 그걸 안 큰할머니는 크게 역정을 내곤하셨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엔 나도 갈일이 없었다가 성인이 되어 큰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큰집을 방문했다. 내 기억에 있는 큰할머니는 고약한 성격의 마귀할멈이었는데 사진 속 큰할머니는 새하얀 머리를 쪽지고 새하얀 한복을 입고 있고 그 모습이 곱고 인자했다.

 오는길에 작은 할머니에게도 들렀다. 작은 할머니에게 딸이 하나 있었지만 살뜰히 챙기던 딸도 먼 곳으로 시집을 가고나서는 아무도 없는 마을 변두리에 혼자 남으셨다. 어릴땐 포근하고 따뜻하고 먹을게 넘쳐나던 집이었는데 나이 들어 둘러보니 너무도 외딴 곳에 초라하게 자리잡은 다 쓰러진 집이었고 그 안에 홀로 계시는 작은할머니는 쪼그라든 듯 작아 보였다. 가려는 내게 이것저것 손에 싸들려 보내며 눈물을 훔치시던 기억이 난다.


 어렸을 땐 몰랐던 사실들이 성인의 눈으로 보면 새롭게 보이곤 한다. 서로를 할퀴며 상처내며 살았지만 우리 할머니들도, 이 책 속에 등장하는 구박하는 시어머니도 상처주는 시누이도, 할머니들의 올케도 엄마도 언니도 같은 여자의 마음으로 보면 다들 한 많은 세월을 살다갔다. 모두 가엾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 몰랐나. 손경애 할머니 일기




 할머니들이 글을 못 배웠으면 어쩔뻔 했나. 절절한 사연들이 세상에 전해지지도 못하고 사라 질뻔 했다.

 할머니의 일기에는 공통적으로 글을 모르는 수치심과 배움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데 이제 은행에서 비밀통장도 만들고 주민센터에서 이름도 직접 쓰고 가게 간판도 읽을 수 있어 행복하다고 한다. 할머니들이 앞으로도 계속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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