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and Aug 08. 2020

왜 웃냐고 묻거든 (늑대아이)

영화 속 '웃음' 돋보기 

 “힘들 때 웃는 자가 일류다.”라는 말이 있다. 내게 있어 이 말은 다른 명언이 그렇듯 좋은 말이긴 하지만 실제로 와 닿는 말은 아니었다. 그 말에 해당되는 건, 고난을 겪어도 그만큼 재능이나 근성이 있어 성공한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혹은 힘들 때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은 시련을 겪어도 실은 믿는 구석이 있는, 애초부터 웃을 여유가 있어서라고 여겼다. 


 힘들 때 웃는 자의 ‘힘든 일’이란 남들이 보기에는 힘든 일일지언정 믿는 구석이 있든 재능이 뛰어나든 간에 실은 본인에게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었다는 거다. 때문에 “힘들 때 웃는 자가 일류다.”라는 말은 일류가 되는 ‘과정’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일류라는 ‘결과’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허울 좋은 말로 들렸다. 영화 <늑대아이>는 ‘웃음’에 대해 약간은 삐딱한 견해를 가지고 있던 내가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만들어 줬다.


 <늑대아이>는 일찍 남편을 잃은 주인공 하나가 두 아이를 키우며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 여느 양육과 다른 점이 있다면, 늑대인간인 남편의 영향으로 두 아이 역시 늑대인간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특별한 소재로 인해 특별한 이야기가 생기고, 긴박감이 생긴다. 영화는 단순히 특별한 소재를 소모하며 끝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소재를 통해 양육을 비롯한 관객이 공감할 만한 일상의 문제를 변주하며 울림을 남긴다. 


 아주 특별한 상황에 놓여있는 하나가 역경을 극복하는 법은 평범하다. ‘괴로울 때나 힘들 때도 억지로라도 웃으라는’ 아버지의 말을 따라 ‘웃는 것’이다. 하나는 순진할 만큼 그 말을 곧이 그대로 따른다. 영화는 그런 하나를 통해 웃을만한 여유가 있는 ‘결과’의 웃음이 아니라, 다음 상황으로 나아가기 위해 숨을 고르는 과정의 ‘웃음’을 보여준다. 


 하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웃다가 친척에게 혼이 났다.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 ‘아이들을 잘 키워 내겠다고’ 웃어 보이기도 하고, 밭에 심은 식물이 말라죽었을 때도 애써 웃는다. 여유에서 나오는 웃음이 아니다. 애써 웃는 것이다. 여유 있어 나오는 웃음이 아니라 여유를 찾기 위한 웃음이다. 


 하나는 종종 늑대로 변하는 아이들에게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시골 마을 폐가를 개조해 살기로 한다. 여기서 만나는 할아버지는 농작물이 시들어버려 안타까워하는 하나에게 “오늘 심어 놓고 내일 자라길 바라면 쓰나.”라며 ‘여유’를 가질 것을 말한다. 그리고는 시종일관 미소를 띠는 하나에게 웃지 말라고 한다. 하나에게 ‘웃음’은 다음 스텝을 밟기 위해 여유를 찾는 과정이다. 자연에서 살아온 할아버지에게 ‘여유’를 얻기 위해 ‘웃음’이라는 과정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 


 하나를 챙겨주는 할아버지가 정말로 하나의 웃음이 정말 싫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하나의 ‘웃음’이 숨을 고르기 위한 단계인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기 때문이다. 순수한 웃음이 아닌, 쉬어가는 과정으로서의 ‘웃음’, 그리고 쉬어가야 할 만큼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할아버지는 그 자신이 하나에 대해 느끼는 안타까움이 싫은 것이다. 


 하나가 ‘웃음’을 짓는 것처럼 영화는 진행되는 방식 그 자체로 ‘여유’에 대해 말한다. 영화에서는 유독 부드러운 현악기와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 편안한 음악과 함께 특별한 대사나 인물의 역할 없이 그림동화처럼 흘려보내는 장면이 많다. 단순한 인서트는 아니다. 음악과 그림만으로 진행되는 시퀀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의미 덩어리이면서도, 여유가 있다. 뭔가 비어 보이는 장면에 관객은 편안함을 느낀다. 마치 영화 자체가 웃어 보이는 것 같다.

 하나의 웃음, 영화의 방식, 농촌 할아버지의 삶. 이처럼 영화는 여백과 여유라는 가치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영화가 보여준 웃음과 여유라는 크고 작은 변주를 넘어 하나 영화는 큰 이야기 영화가 말하는 ‘여유’라는 가치를 보여준다. 


 “간호사든 교사든 빵집이든 원하는 걸 하게 해주고 싶어.” 하나의 남편은 첫째가 태어나자 아이를 보며 원하는 걸 해주고 싶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늑대’는 없다. 한편 아이를 기르면서 하나는 아이들이 ‘늑대’로 살아가는 선택 역시 생각했다. 하나는 아이들이 선택해야 할 길이 무엇이라고 정해주지 않고 기다려준다. 아이들 스스로 정할 때까지. 


 하나가 계속해서 웃으며 지냈던 것은 숨을 고르는 과정이자, 아이들에 대한 마음을 넓히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하나가 결국 각자 다른 길을 간 아이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까닭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하나의 마지막 웃음은 그 전의 웃음과는 다르다. 그 전의 웃음이 삶에서 일류가 되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하나의 마지막 웃음은 수많은 웃음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힘들 때 웃는 자는 일류(가 되려는 자)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극의 수단 (현기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