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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nd Aug 21. 2020

늑대가 나타났다 (행복한 라짜로)

영화 속 '소리' 돋보기

 영화 <행복한 라짜로>는 현실과 동화를 ‘넘나들지’ 않는다. 넘나들기보단, 지독한 현실과 신화의 경계가 모호하며 구분이 되지 않게 촘촘히 엮여있다. 그렇게 영화에서 말하는 신화는 현실에 녹아든다. 


 영화는 교묘히 신화와 현실을 엮는다. 영화는 실제 일어났던 이야기를 차용한 전반부의 이야기로부터 신화적인 후반부로 넘어간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의 전반부를 가지고 영화 후반부로 간다. 그 사이 1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다. 절벽에 떨어져 뒤늦게 도시로 나간 라짜로는 하나도 늙지 않는다. 한편 경찰에 발견되어 도시로 나간 사람들은 현실의 흐름대로 살아가면서 신화적인 인물 라짜로를 맞이한다. 네오리얼리즘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영화에 신화가 가미된다.   


 이야기 구조뿐 아니라, 영화는 시청각적 방법론을 사용해 신화와 현실을 엮는다. 영화의 화면은 요즘 영화 스크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2.35:1이나, 1.85:1의 화면비율이 아니다. 그보다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1.6:1이다. 실제 했던 자료화면을 보는듯한 사실적인 화면비율이다.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카메라 이동과 거친 필름 상태는 영화에 현실성을 더한다.  


 영화가 ‘사실성’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면, 소리로는 은유를 통한 ‘신화성’을 담는다. 영화는 오프닝 마지막에 달을 비추고 늑대의 울음소리를 들려준다. 늑대 울음소리는 후에 탄 크레디와 라짜로에 의해 별 의미 없는 소리처럼 변주되기도 한다. 그 울음소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준다. ‘불안’은 엄밀하게 파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화적 요소다. 그렇게 작품 전반부의 늑대 울음소리는 작품에 신화성을 부여한다. 또한 영화는 전환점을 맞이하는 부분에 내레이션을 넣음으로써 극적 상황을 설명한다. 특별한 내용이 없는 화면에 깔리는 내레이션은 강력한 힘을 가진다. 들리는 것은 시각요소보다 더 큰 집중력을 요구하며 듣는 사람은 자연스레 자발성과 적극성을 가지고 귀를 기울인다. 이로써 영화는 효과적으로 현실과 신화를 엮는다. 

‘무리에서 이탈한 늙고 병든 늑대를 마을 사람들은 무서워한다.’


 내레이션은 영화가 전환점을 맞이하는 부분에서 늑대 이야기를 들려주며 늑대 울음소리를 두려워하는 것이 모순적임을 말한다. 마을 사람들은 농작물을 망쳐놓는 늑대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불합리하게 부려먹는 후작부인을 경계했어야 한다. 도시로 나온 마을 사람들은 기찻길 옆에 간이 거처를 마련해 놓고 좀도둑질을 하며 여전히 어렵게 산다. 이들은 더 이상 늑대울음소리를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을 두려워할지조차 모른 채 나아질 여지가 없는 이들의 삶은 노예일 때보다 좋아 보이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을 노예로 부렸던 후작부인의 아들 탄크레디 역시 몰락한다. 탄크레디의 부인은 은행을 탓한다. 역시 진짜 두려워할 것과 경계해야 할 것을 모르는 태도다. 은행이나 제도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늙고 병든 늑대울음소리의 연장일 뿐이다. 자본주의나 핵무기가 그 자체로 ‘악’이 아니듯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주 가깝지만 들리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것이다. 


 영화는 현실을 말하는듯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말한다. 이는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조차 못하는 것에 대한 문제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오래된 신화를 도입한다. 신화성은 ‘소리’로 극대화된다. 탄크레디의 집에서 나온 라짜로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교회를 방문하지만 쫓겨난다. 그러자 교회에 있던 음악이 그를 따라온다. 이는 라짜로가 은행에 크레디의 돈을 돌려줄 것을 요구할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경건한 음악은 군중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힘없고 병든 늑대의 울음소리에 불안해하는 것과 대조된다. 그들은 정작 신의 현신으로 보이는 라짜로에게 경외심을 느끼지 못하고 라짜로를 폭행한다. 이들은 두려워할 필요 없는 늑대소리를 두려워한다. 사회의 진짜 문제나, 불합리에 대한 소리 혹은 자신들의 영혼이 망가지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영화는 신화적인 요소를 통해 민중의 일상적 삶과 사회 현실을 보다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그러면서도 신화적 요소를 통해 착취나 자본주의 같은 사회의 구체적인 제도 혹은 행동 양상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주제의식을 확장한다. 믿음과 구원에 관한 것이다.     


 라짜로는 법이나 종교, 공동체를 통틀어서도 흔히 말하는 작은 ‘죄’도 짓지 않는 인물이다. 성자와 다름없다. 사람들은 그 성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라짜로는 영화에서 누구를 부르지 않는다. 부름을 받을 뿐이다. 시키는 일을 할 뿐 그 자신은 무엇을 원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라짜로는 소리를 흡수할 뿐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한편 늑대는 선한 사람인 라짜로를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런 라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심지어 해하기까지 한다. 늙고 병든 늑대의 ‘울음’을 무턱대고 두려워하며 진짜 성자에 대한 경외심은 보이지 않는다. 역사에 반복되는 비극이다. 


 사람들은 성자를 알아보고 그의 말을 직접 경청하지 못한다. 오히려 경외해야 할 대상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성자를 위시한 세력들의 때 묻은 외침을 두려워한다. 성자의 말은 듣지 않고, 위협이나 폭력적인 소리에 굴복하고 두려워한다. 라짜로 같은 성자의 소리는 줄어들고, 그를 위시한 누군가의 입맛에 맞게 재단된 소리들이 가득 찬다. 근거 없는 비방. 겁에 질린 욕설. 할렐루야. 그래 봤자 늙고 병든 늑대의 울음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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