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사람들은 ‘뉴페이스’를 좋아한다. 따끈따끈한 신입사원도 일 년 뒤에는 찬밥이 되듯, 영특하다고 칭찬받던 나도, 새 얼굴인 음언니가 나타나자 찬밥까진 아니어도 미지근한 밥이 됐다. 사실 난 좋았다. 촉망받는 어린애들이 느끼는 부담감을 좀 덜기도 했고, 전적으로 응원해 줄 존재가 생겼기 때문이다. 질투나 시기보다는 나 역시 덩달아 음언니에게 진심 어린 박수를 보냈다.
별걸 안 해도 진심 어린 박수와 환호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보통 외모가 특출나거나, 유머러스해서 좌중을 압도한다. 그러다 보면 그들은 많은 이들에게 실제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우상화되는 것이다. 우리 집에선 음언니가 그랬다. 뭘 해도 박수와 응원을 받는 존재. 실상은 병원에서 돌아오고 나서는 거의 누워만 있는 음언니였다. 그러다 한 번 구르기 비슷한 걸 했다. “이거 봐라, 이거 봐라!” 무뚝뚝한 아버지가 그럴 정도면 정말 대단한 것임이 분명했다.
나에겐 그 자체가 놀라운 건 아니었다. 다만 동생이 이렇게 가다가 정상으로 회복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이 놀라웠다. 뭐든 앞서가는 면이 이때부터 생겼나 보다. 그만큼 음언니의 움직임 하나하나, 말소리 하나하나는 모두 관심의 대상이었다.
어느 날 음언니가 스스로 몸을 일으켜 혼자 앉았다. 부모님과 나는 둘러앉아 음언니를 칭송했다. “어쩜 어쩜, 정상 같은데?” 엄마가 경쾌하게 말했다. “이러다 걷는 거 아냐?” 아버지도 약간은 상기된 채 기대감을 이어 갔다. 엄마 말은 정상같이 보이지만 분명 정상은 아니라는 말이다. 아버지 말도 ‘정상’에만 가까이만 가도 성공이라는 말로 들렸다. 그에 반해 동생을 지극히 정상이라고 믿었던 난 조바심이 났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얼마 후엔, 정말로 음언니가 스스로 일어서더니 걷기 시작했다. 양손으로 바닥에 손을 짚고 허리를 일으켜 일어선 것이다. 오른쪽이 불편함에도 절룩거리며, 집안의 가구를 의존해 걸었다. ‘이것이 인간의 위대함인가!’ 그 어린 마음에도 인간의 능력에 대한 경외감을 새삼 느꼈다. ‘이제 음언니에게 말을 가르쳐야 하나, 그다음엔 뭘 가르쳐야 하나...’ 여덟 살이었던 나는 내 초등학교 학업은 뒷전인 채, 허황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 후로 음언니는 잔디밭에서, 바닥이 푹신한 고무바닥 같은 야외에서 산책하며‘걷기 운동’을 했다. 일반적인 가정의 행복의 모습이다. 당시 내 나이를 고려할 때, 4살 차이라는 늦둥이 동생을 본. 나 역시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말은 안 통해도 같이 손잡고 아장아장 걷던 때. 어떻게 보면 눈높이가 가장 맞던 때였다. 동시에 앞으로 더 나아질 장미빛 미래까지 그리면서. 하지만 음언니의 활약은 거기까지였다. 그게 전성기였더라면 더 많이 같이 걸을 걸 한다. 예나 지금이나 항상 지나고 나야 그때가 최고 좋았던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의 직립보행을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첫 장면, 원숭이에 가까워 보이는 털로 덮인 인간이 네발로 기어가다가 몇 번의 변화를 거쳐 네 번째 그림에서는 결국 일어나는 것이다. 그 뒤는 왜 그리지 않았을까. 결국 인간은 나이가 들면서 걷지 못하게 되고 원래로 돌아간다. 음언니는 그 과정이 유독 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