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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nd Jan 14. 2024

"말 하지마, 웃지도 마"

 한 음식점에서 한 6살쯤 되어 보이는 아들과 아이의 아빠가 나란히 앉아 있다. 그 앞에는 엄마가 아이의 동생을 안고 보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식사는 다 마친 것 같은데 아빠가 옆에 앉은 아들에게 뭐라고 하고 있었다. 표정으로 보아 혼을 낸다거나 잔소리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아이는 심통 난 얼굴이었다.

 “아빠 말 하지 마” 참다못한 아이가 터져버렸다. 소리를 크게 지른 건 아니지만, 약간 커진 목소리로 분명하게 약간은 칭얼거리는 섞어서 아빠에게 더는 말도 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한 가정의 일상적인 외식 풍경이라고 생각했던 터라 갑자기 들린 그 말의 이유가 무척 궁금해졌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인 부자를 가만히 지켜봤다. 

 졸지에 아들에게 발언권을 박탈당한 아버지의 표정은 너무 해맑았고 오히려 그런 아이가 대견하다는 듯 사랑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빠 말 하지 마?” 하는 아빠의 표정은 아버지의 근엄함이 아니라 아들 또래 친구의 다정한 표정이었다. 그러자 아이는 싱긋 웃는 아빠가 얄미워 죽겠다는 듯 “아빠 말하지 마 웃지도 마!”하며 엄포를 놓았다. 

 “알았어. 아빠 말하지 말고 웃지도 않을게” 발언권에 이어 웃음권마저 빼앗긴 아빠가 항복하자 아이는 ‘흥’하며 부모를 따라 음식점을 나섰다.

 부러웠다. 앞으로 내가 다른 누구에게 “말도 하지 말고 웃지도 마세요”라고 진심으로 할 수가 있을까. 그것도 화가 나서 과장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상대가 말하는 것도 싫고 날 보며 웃는 것도 싫어서 말이다. 그렇다고 평생 그 상대랑 안 볼 것은 아닌 상황에서 자신의 기분에 그렇게나 충실하게 몰입해 상대에게 당당히 요구할 수 있지 못할 것 같다. 

 또 그 아빠가 부러웠다. 어떤 말을 들어도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다 용서되고 웃음이 나는 경우가 있을까. 뭘 해도 다 괜찮고 웃음이 나는 기분은 뭘까. 아이 아빠의 귀는 왠지 말랑거렸을 것 같다.

 기억은 안 나지만, 나 역시 비슷하지 않았을까. 지금의 내가 스스로 문제 해결을 하고 의사 표현을 하기 전에는 내가 어떤 말을 해도 가만히 받아줬을 부모님과 아이라고 용인해 줬을 어른들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들어주고 어떻게 말해도 커가는 과정이라며 이해하고 받아줬을 사람들이 있었기에 내 주장을 하고 나만의 생각을 키워가면서 나로 커갈 수 있었을 테다. 

 “말하지 말고 웃지도 마”하는 아이의 말을 들어주는 건 그 아이가 그 어른으로 자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한 영혼에서 여과 없이 나오는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말랑귀들은 아이들이 여러 성격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세상을 더 넓게 만든다.     

 나는 그런 말에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 되물어 본다. “어허 아빠한테, 말도 하지 말고 웃지도 말라 그래 버릇없게!”라고 말하는 건 아닌지. “어디 선배한테!, 어디 형님한테!” 이러면서 상대의 영혼을 움츠러뜨리고 결코 상대 자체를 나오지 못하게 막아버리는 것은 아니었을는지.  

 다양한 목소리를 받아주는 것은 그 목소리를 받아 널리 퍼뜨리고, 자기 생각을 반영해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우선은 있는 그대로 그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이다. 누구나 한때는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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