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장갑 껴도 손 시릴 걸.” 막 장갑을 끼고 나가려던 찰나 아버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테니스를 치러 가기 전,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 나는 급히 장갑을 찾았다. 갑자기 찾으려니 도저히 못 찾겠어서 신발장 서랍에 있던 작업용 장갑 하나를 찾아 손에 끼던 차였다. 하지만 다른 장갑이 없으니 아쉬운 대로 그 장갑을 끼고 나왔다.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시간이 지나자 바람이 그대로 들어왔다. 오히려 장갑 표면이 차가워져서 손을 얼음으로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장갑을 벗는 편이 더 나았을 것도 같았다. 테니스를 치는 와중에도 장갑을 낀 손에 입김을 불어가며 손을 녹였다.
손이 시려 테니스를 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손이 계속 어는 것을 느끼고서야 결국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정말 따뜻한 장갑을 사야지. 내 몸의 다른 부분은 한겨울인 것을 알아도 적어도 손만큼은 어느 계절인지, 어느 나라인지 모르게 할 정도로 따뜻한 장갑.’ 굳은 다짐을 했다. 하지만 급하게 끓었던 마음은 따뜻한 집에 돌아오니 그만큼 급하게 식어버렸다. 홈쇼핑이며 인터넷이며 얼마든지 쉽게 살 수 있는 세상이지만, 정작 금방 까먹고 귀찮아하는 내게 뭘 마음먹고 산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것이다.
“사줄까?”
따뜻한 집에 있다 보니 손 시렸던 건 생각도 못 하고 다음 주에 운동할 것도 생각 못한 내게 아버지가 물어봤다. “어떤걸요?” “장갑 말이야 없는 거 같은데 그거 별로 안 따뜻할 건데, 손 시리니까.” 아버지는 내가 손 시려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마땅한 장갑이 없는 걸 알고 물어본 것이다. 당사자인 나조차 까먹은 고통을 아버지는 기억하고 있던 거다.
아버지에게 사줄까? 라는 말을 듣는 것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쓰는 돈을 아까워해서가 아니라, 소비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버지여서다. 워낙 검소해 돈을 쓰는 것이 괴롭고, 또 그 가운데 현명한 소비를 해야 하는 압박도 있으니 아버지 사전에 ‘사다’라는 말은 ‘괴롭다’와 비슷한 말이다. 지난 세월 아버지의 아들로 살면서 그런 아버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나는 그 말이 놀랍게 다가왔다. 먼저, 그것도 아주 분명하게 사줄까? 라고 하신 적이 있었나. 소비에 관해서라면 아버지 방식대로 조기교육이 잘된 나는 단언컨대 아버지께 어떤 것이든 먼저 사달라고 한 적이 없다. 정말 사고 싶다면 엄마에게 말했으면 했지. 또 그런 덕분에 나 또한 어떤 것을 가지고 싶다는 욕구도 애초에 다른 사람보다 적다.
익숙하고 많이 쓰이는 단어라지만 그 말하는 사람을 깊이 이해한다면 다르게 들리는 말이 있는데 아버지에겐 그 대표적인 단어가 ‘사다’인 것이다. ‘이 정도라고?’ 할 정도로 아버지는 소비를 꺼리시는데, 그런 아버지에게서 자발적으로, 그것도 아주 진지해서 마치 “네 사주세요.” 하면 당장이라도 사다 줄 것 같은 ‘사줄까?’를 들은 적은 처음이지 않나 싶었다. 이렇게 자꾸 같은 이야기를 중언부언하게 되는 것도 그만큼 놀라운 일이여서인데, 어떻게 표현할 뾰족한 수가 없다.
아버지는 소비로 인해 당신이 느낄 괴로움, 고민, 망설임, 후회(소비가 싫은 이유 중 하나가 사고 나면 무조건 후회하는 마음이 들어서라고 하셨다) 등의 감정을 무릅쓰고 내게 ‘사줄까’를 거침없이 말한 것이다.
아버지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해 와서 과잉으로 감동한 거일 수 있다고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이걸 위해 지난 세월을 몸소 그렇게 보여주셨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의도된 가스라이팅이 현실적일 만큼 아버지의 씀씀이는 비현실적이었기에.
아버지는 내 모습을 보면서 ‘손 시리겠다.’ ‘안 됐네’ ‘따뜻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건강했으면’이라 생각했을 것이고, 그 안에는 요즘 사람들은 흔히들 하는 말 ‘사랑한다’도 있었을 것이다. 그 마음들이 모여 마침내 아버지는 가장 괴로운 소비 행위와 관련된 ‘사줄까’라는 단어를 말하게 된 걸 거다.
다음 날 책상에는 장갑과 방한대가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