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수거장에 가던 참이었다. 분리수거장 앞에는 놀이터가 있는데, 딱 아이들이 놀기 좋아진 날씨라 그런지 아이들이 많이 보였다. 그런 아이들의 기운은 약간 거리를 둘 때 더 힘이 된다는 생각에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도착했다. 그러자 점점 아이들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더니 어느새 한 여자아이가 내 바로 옆에 서 있었다.
가만히 서서 어딘가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을 따라갔다. 아이는 플라스틱을 배출하는 자루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뭔가를 뒤적뒤적 찾더니 투명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주워들었다. 편의점 음료를 먹거나 할 때 사는 얼음컵처럼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그저 투명한 컵이었다. ‘그래도 깨끗한 걸 골랐네’ 하고 나도 모르게 그 상황에 빠져 들었다.
“이것만 있으면, 보물을 찾을 수 있어”
아이는 투명한 컵을 트로피처럼 들어 올리더니 다가온 다른 아이 2명에게 말했다. ‘저걸로 찾을 수 있는 보물이 뭘까?’ 아이의 절도 있는 동작과 수수께끼 같은 말은 나를 더 몰입하게 했다. 점점 고조되는 아이의 즉흥 공연을 계속 흘끔거리며 봤다. 어서 그 보물이 무엇인지 보고 싶었다. 그 투명한 컵은 나도 분리 수거함에서 금방 구할 수 있을 테니 그 보물이 뭔지만 안다면 나도 금방 얻을 수 있으리라고도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절정을 향해 가던 공연은 미완성으로 남게 됐다. 멀리서 누군가 “얼른 와 가자”라고 하는 말에 아이가 투명 플라스틱 컵을 도로 수거함에 넣고 가버린 것이었다.
‘물인가? 아니면 컵에 비치는 햇빛? 반사되어 보이는 무지개?’ 그 보물이란 게 대체 무엇일지 생각했다. 아이를 다시 만나면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다 문득 아이가 처음에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것만 있으면, 보물을 찾을 수 있어” 그러니까 투명 플라스틱 컵은 아이가 말하는 어떤 보물을 찾는 수단인 거다. 보물은 아니어도 보물을 찾는 데 쓰이니까 보물만큼 귀한 것일 텐데, 또 아이도 조금 전까지 “이것만 있으면”이라며 연극 투로 말하지 않았나. 그걸 가지고 가지 않고 미련 없이 버리고 휑하니 사라진 게 또 의외였다.
가령 보물이 행복이라면 그걸 얻는 수단 가운데 하나인 돈을 버리지는 않는다. 혹은 재물 자체가 보물이라면, 그 재물을 얻는 수단인 일자리나 수익 구조를 쉽게 손에서 놓지 않는 게 보통의 마음인데, 그걸 쉽게 놓고 가는 그 아이의 뒷모습에서 뭔지 모를 아우라가 보이는 것 같았다.
아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떠났지만, 보물을 찾는 수단인 컵을 미련 없이 다시 버리는 것에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것 같았다.
“보물을 얻는 수단 자체가 귀하고 얻기가 힘들다면, 그렇게 얻는 보물은 또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보물을 얻는 수단은 언제나 손에서 놓을 준비가 되어 있고 또 원하면 취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 수단은 도리어 보물을 집어삼킨다. 혹은 정말 본인이 진심으로 원하는 보물이 아니라, 모두가 원하는 보물을 좇는 게 될 수 있다. 그렇기에 그 수단도 귀한 것일 테니. 자신만의 고유한 보물을 분명히 안다면, 그 수단 역시 남들이 보기엔 그렇게 원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꽁꽁 싸매지 않고, 자리에 두어도 될 만큼.
아이의 즉흥극은 미완성이 아니라 극장을 나서는 관객에게 여운까지 주는 충만한 공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