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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교일기 #5] 어디까지 속일 수 있을까

임신 10주 차,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임밍아웃

by Sylvan whisper

‘내가 신호 주면 그때부터 자기가 내 핸드폰으로 영상 찍는걸로 하자!’


우리의 소중한 비밀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꽤나 많았다. 양가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이, 만날 때마다 어서 아이를 가지라고 한 마디씩 남기던 단짝친구 부부, 결혼도 먼저 아이 출산도 먼저였던 아내의 친구들, 많은 조언을 받아온 선배 등등. 사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바람을 품었던 사람은, 어쩌면 우리 부부보다도 더욱 아이를 바랐을 수도 있는 예비 할머니 할아버지, 우리 양가의 부모님들이었다.


그 때문인지 나는 부모님과 장인장모님께 말씀드릴 순간이 기다려졌다. 그들의 반응이 기대되기도 했다. 우린 장인장모님께 먼저 말씀드리기로 했고, 어떻게 놀라게 해드릴지 작전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우리가 지내는 서울에서 처가댁이 있는 대구에 방문할 구실이 필요했다. 이런 귀여운 작당모의는 퍽 '재미있었다'라고 추억할만했다.





‘응 엄마~ 결혼식이 있어서 대구 가려고.’


저녁에는 집에 들러 식사를 같이 하면 될 듯 하다며, 장인장모님과의 스케줄을 잡았다. 대구 수성구에 있는 호텔 예식장에서 오후 2시 30분 예식, 대구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막역하게 지내던 선배님의 결혼식이고, 결혼식이 끝나면 아내의 친구와 잠시 만나는 스케줄을, 그리고 그 뒤 저녁즈음 처가댁을 방문하는 시나리오였다. 여기에 더 디테일을 추가해서, 아내의 친구를 만나기 위해 우리가 다녀온 곳은 집에서 1시간 거리의 위치. 우린 이런 자잘한 설정들을 그렸다.

거짓말은 구체적일수록 좋다. 사실은 그렇게까지 필요하지 않은 설정 들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마치 우리의 이 소중한 비밀이 그들에게 모습을 드러낼 때, 조금이라도 더 예쁘고 귀여운 모습이길 바라며 이 옷 저 옷 입혀보는 과정 같기도 하여 우린 신이나서 이야기를 만들었다.


비밀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위해 우린 초음파사진이 담긴 카드를 준비했다. 그리고 초음파사진과 카드를 먼저 열어보시기 전, ‘할아버지 당첨’, ‘할머니 당첨’이 적힌 복권을 구매하여 좀 더 이벤트 다운 형식을 갖추었다.


'뜬금없는 복권은 어색할 수도 있지 않아?'

'오늘 방문한 결혼식에서 이벤트로 복권을 나눠주더라고 하면 되겠어!'


세부 설정이 하나 더 추가 되었다. 그럴싸한 스토리에 우린 둘이서 킥킥거리며 웃었다. 아가도 뱃속에서 재미있다고 생각했을까?


처가댁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를 마치고 과일과 함께 담소를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아내는 준비했던 복권을 장인, 장모님께 건넸다. 다행히 장인장모님은 어떠한 의심 없이 복권을 긁기 시작하셨다.





‘어머 당신 말이 맞네!’


어머님은 먼저 눈치를 채시고는 깜짝 놀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곧이어 눈물을 흘리셨다.


내가 아는 어머님의 말투와 어조는 경상도 사투리라고는 느낄 수 없는, ‘우아함’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정도로 차분한 말투셨다. 그렇지만 이 순간의 어머님의 목소리 톤은 마치 즐거움에 가득 찬 여고생들의 말투와도 비슷할 정도로 격양되어 있었다.

어머님은 연신 아내에게 ‘어머 너무 축하해!’ 하며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버님은 조용히 눈시울이 붉어지셨다. 초음파사진을 집어 들어 큰 날숨을 뱉으시고는 두 손으로 눈을 가리셨다. 우리의 소중한 비밀에 대한 장인장모님과의 개회식은 감동의 눈물로 채워졌다.


오늘 우리가 내려올 때, 아버님께서 혹시 아이가 생긴 게 아니냐는 ‘촉’이 발동하셨다고 한다. 아내가 직장을 쉬게 된 것, 어머님께 제육볶음과 복숭아가 먹고 싶다고 한 것 등으로 인한 추측이셨다. 태몽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법한 꿈도 꾸시어 이러한 장인어른의 추측에 무게를 더 실었다.




‘어디까지 속일 수 있을까’


장인장모님은 아주 깜빡 속으셨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런 와중에도 어떤 ‘촉’이라는 것이 발동했다. 운명이라는 것은 신비로운 힘이 있나 보다. 나는 항상 ‘아이’, ‘자식’이라는 영역은 운명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들의 머리는 속일 수 있었고 깜짝 놀라게 해드릴 수 있었지만, 그 운명이 지닌 기운은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생명은 신비롭게 찾아온다. 운명이라는 것은 이런 ‘신비롭다’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운명 자신의 존재 자체를 숨길 수 없나 보다.






한 줄 정보


1. 태몽은 보통 임신초기에 주변사람이 꾸는 것으로, 임밍아웃이 늦어지면 태몽을 잊어버리는 불상사가 있을 수도 있다.

2. 주변에 태몽이 도저히 없을 때, 다음과 같은 속설이 있다. '태몽이 없는 아이는 환생이 없는 첫 번째 생으로 태어난 아이이다'

3. '임밍아웃' 아이디어, 아이템은 정말 다양하다. 검색하면 다양한 플랫폼에서 판매 중이다.

4. 임밍아웃은 보통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부르는 12주차 이후에 많이들 하나, 개인마다 천차만별

5. 초음파 사진은 병원마다 조금씩 다르며, 3D·4D 옵션을 선택하면 태아의 표정까지도 담을 수 있다.

6. '촉'이라는 것을 정확히 정의하기 어렵듯, 생명이라는 운명이 지닌 속성은 항상 신비로움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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