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19주 차, 아내의 심통
아내에겐 중학생 시절부터 이어져온 막역한 친구들이 있다. 학창 시절 우정부터 시작한 이 친구들의 모임은 어느새 두 배, 세배로 불어나 있었다. 각자의 남편들이 모여 두 배가 되었고, 가장 먼저 태어난 한 친구의 귀여운 아들과 얼마 전 출산한 다른 친구의 어여쁜 딸, 그리고 아내의 뱃속에 있는 우리 사랑이까지 정확히 3배가 된 것이다. 우정이라는 끈에서 시작한 인연이 가족이라는 매듭을 향해 가고 있다. 모두 경상도 출신인 이 세 명의 친구들은 운이 좋게도 현재 모두 수도권에 거주하여, 제법 덩치가 커진 이러한 모임을 종종 갖게 되었다. 아마도 타향살이를 하면서도 고향친구를 근처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이 이들을 더 끈끈하게 엮어주는데 한몫했을 것이다.
아내의 절친한 친구들, 그리고 남편들 또한 이젠 친근한 형님 아우들이 오래간만에 만나기로 한 주말이었다. 다른 두 부부가 경기도에 거주하고, 우린 서울이다 보니 약속장소는 경기도의 한 공원으로 정해졌다. 주말 오후 서울에서 경기도로 빠지는 길에는 빠질 수 없는 교통체증을 거쳐 우린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이로 인해 우리의 예상보다 공원에 도착하는 시간이 꽤나 지체가 되었는데, 다른 두 가족은 공원에 먼저 도착하여 산책을 하고 있었다.
공원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고 복잡했다. 도로를 사이에 각 블록의 두 개의 공원이 육교로 이어진 듯한 구조였고, 메인이 되는 한쪽 공원의 규모가 한눈에 지리가 파악될 정도로 작지 않았기에 지도가 필요하였다. 이러한 규모에 맞게 주차장 또한 2군데가 있었다.
더 큰 메인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공원에 들어가니 당연하게도 우린 방향감을 상실했다. 먼저 도착해 있던 친구들이 아내에게 설명해 준 그들의 위치는 '주차장에서 입구로 들어와서 오른쪽으로 오다 보면 나오는 놀이터'였는데, 이게 사실은 굉장히 모호한 방향 기준이었다.
정확하게 방향과 위치를 다시 특정하고 발걸음을 옮겼어야 하나 우리는 친구들의 설명에 의존하여 일단은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하필이면 우리가 택했던 길은 육교를 건너 맞은편 공원으로 넘어가는 길이었는데, 멀리서 그 맞은편 공원의 '놀이터'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방향이었고 이제 몸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한 아내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육교를 두 번 넘고,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아내는 심통이 나버린 것이다.
이날의 아내의 모습은 내겐 사실 꽤나 낯선 모습이었다. 금방 사라졌지만 아내의 심통의 화살이 친구를 향하는 모습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아내가 불편한 기색이 있으면, 나의 반응은 대부분 아내를 달래주거나 문제 해결에 나서려고 하는 것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일은 나도 처음 겪는 모습인지라, 섣불리 어떤 언행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우린 다시 방향을 잡고 침묵 속에서 친구들을 향해 걸었다. 10분 남짓 걸었을까, 금방 친구들 무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런 우릴 처음 반겨준 것은 이제 총총 뛰어다닐 수 있게 된 귀여운 아들 OO이었다. 아내는 아가를 보자마자 웃으며 달려가 와락 끌어안고는 반가움을 쏟아냈다. 그리고 뒤이어 안겨있는 딸의 볼을 어루만지고 친구들과도 간만의 안부인사를 나눴다. 남편들은 뒤에서 눈빛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아내의 심통은 언제 그랬냐는 듯 눈 녹듯 사라져 있었다.
물론, 아가들과 친구들을 막상 마주친 반가움이 아내의 기분을 풀어준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던 듯했다.
'역시, 임산을 하면 호르몬으로 인해서 기분이 금방 변해'
'몸이 점점 무거워지면 금방 피로해지고, 컨디션에 의해서 예민할 수 있어'
내가 이날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느낀 것은 이런 단순한 인과관계가 아니었다. 우리가 친구들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하고 마침내 그들을 발견하기까지의 10분 남짓. 이 짧은 시간 동안 아내는 자신의 기분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게 화였던 짜증이었던 가벼운 심통이었든, 그 감정의 날카로운 정도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분명히 느낀 것은 그 침묵 속에서 아내는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당황해서 아무 대처를 못했던 순간이 오히려 내가 아내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게 해 준 꼴이었다. 덕분에 나는 귀중한 아내의 모습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임신으로 인한 호르몬의 영향, 임신으로 인한 신체 변화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진짜로 느껴야 하는 것은 산모의, 아내의 이러한 노력이 아닐까. 산모들은 매 순간을 고군분투하고 있다. '임신'이라는 것이 주는 모든 영향과 변화를 맞닥뜨리고 또 싸우고 있다. 우리는 그 노력 자체를 알아차려 줄줄 알아야 하고, 필요시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 또한 때로는 그 노력이 결실을 맺을 때까지 기다려 주는 자세도 필요하다. 아내들의 그러한 노력에 고마움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아내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 작은 싸움들을 나는 이제 더 깊이 바라보려 한다
한 줄 정보
1. 임신 중 산모가 느끼는 ‘예민함·짜증·피곤함’은 인격 문제가 아니라 신체가 보내는 정상적 신호다.
2. 임신부는 평소보다 감정을 ‘다스리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쓰기 때문에 남편의 배려가 큰 도움이 된다.
3. 남편이 산모의 감정 변화를 ‘해결’하려는 태도보다 ‘관찰하고 기다리는 태도’가 도움이 되는 순간이 있다.
4. '심통이 금세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뒤에는 짧지만 치열한 내적 정리 과정이 존재한다.
5. 남편은 산모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노력까지 바라봐줄 때 관계의 안정감이 강화된다.
6. 이 시기의 부부는 서로의 감정 리듬을 재학습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7. 태아의 뇌가 어른의 80% 수준으로 발달한 시기이다.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를 구별할 수 있다.
8. 본격적으로 산모의 체중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9. 아빠 또한 호르몬의 변화가 생긴다. 남성호르몬이 줄어들어 감정적으로 변하나, 아내와 아기를 더 보살피게 하도록 진화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