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3주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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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스테이를 갔다 왔다.
머리를 비우고 내가 가야 할 길을 점검할 수 있는 기회가 되겠거니 하고 다녀왔다. 작은 절, 소박한 사람들이 모여 대체로 재밌고, 오래간만에 명절다운 설을 보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다. 마야가 반갑게 반기던 집으로. 홈캠으로 봤을 때 내가 누웠던 자리에 그대로 앉아 하루 종일 잠만 자고 있던 모습이 내내 미안했다.
남은 연휴를 보내고,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한다.
월 초에 큰맘 먹고 만들었던 반찬을 꺼내 저녁을 차린다. 한 번도 손대지 못하고 상해버린 반찬들만 자꾸 나온다.
어느 틈에 상해버렸을까, 잘 먹겠다고 장을 보고 만들어둔 반찬들이 만든 이의 손을 한 번도 타지 않고 보름을 지났으니 당연한 걸까. 결국 남은 건, 내 손을 거치지 않고 만들어진 김치와 레토르트 음식뿐이다.
템플스테이에서 만난 분 중에 한 분은 사주를 볼 줄 안다고 하셨다. 내 사주는 만 28세까지가 인생의 암흑기라 이제는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을 거라고 하셨다. 그녀 자신도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고 나 또한 그렇게 살았다. 3일간 닉네임으로 불러 이름도 모르는 서로에게 행복을 빌어주는 작별인사를 건넨다. 잘 살라고.
그런 인사를 등에이고 돌아온 속세에는 좋아하면서 만든 반찬 위에 하얗고 노란 곰팡이가 자리하고 있고, 나는 그걸 걷어내고 먹을지 버릴지 고민한다. 시큼한 냄새가 나는지 확인하고 젓가락으로 찍어먹어 보고 상한 걸 확인하고 음식물쓰레기봉투에 담는다.
소금이 잔뜩 들어간 것들만 곰팡이들에게서 살아남았다.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짜서 물을 넣고 졸이면 나아질까 싶어서 그대로 둔 조림들.
결국 이렇게 된 김에 버려지는 건 매한가지다.
버리는 김에 같이 버리는 건 전반적인 내 생활패턴인 것 같다. 이벤트가 있어야만 액션을 취하는 것 역시 내 사고도 동일한 것 같다.
수동적이면서 수동적이지 않다.
생각에 곰팡이가 펴서 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 간을 본다. 도저히 먹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날 때까지 냉장고에 머무른다. 차갑게 보관해서 쉽게 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마음이 배신하고 곰팡이를 피운다.
애초에, 차갑게 보관한다고 곰팡이가 죽는 건 아닌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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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기대를 거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된다.
나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다. 나를 압박하는 사람을 싫어할 뿐이다. 그리고 나를 압박하지 않는 사람에게 기대를 건다. ‘좋은 사람일 거야.’라고.
아이러니하게도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되면 압박시키는 재주가 있다. 말도 없이 기대하고, 추측하고, 생각한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아닌 제3의 사람을 만들어두고 눈앞에 있는 사람과 동일시한다. 제3의 사람에게 맞춰진 생각을 눈앞의 사람에게 대입한다.
그리고 기대가 깨진다.
기대가 깨져서 바닥에 흩뿌려진 상태가 돼서야 생각한다. ‘뭐가 잘못된 거지?’. 뭐긴 뭐야 네가 멋대로 이상한 사람을 만들었잖아.
사람의 수준을 멋대로 판단하지 않기로 했으면서 사람은 멋대로 판단하기로 뒀나 보다.
기대하지 않기. 내 마음대로 누군가의 페르소나를 만들고 멋대로 정의하지 않기. 그게 가족이건, 친구건, 애인이 되었든 간에.
그래도 예의 있는 척하면서 어깨빵 치면서 번호 물어보는 놈들은 극혐종자로 정의해도 될 것 같다. 다시 생각해도 짜증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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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불안이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정확히는 불안을 겪는다는 경험이 도움이 될 때가 있다.
내가 정의한 이 심연이라는 이름의 불안이랑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지를 설명할 때면 사실 어깨가 올라가기도 한다.
내 불안은 원인이 없는 불안이면서 동시에 원인이 있는 불안이다. ‘가족’이라는 원인은 있지만 ‘가족’의 어떤 것이 내 불안으로 이어졌는지는 불투명하다. 찾아야 하는 것 중에 하나겠지.
이제 막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괜찮다고 같이 잠수해 보는 것도 괜찮다고 겁먹지 말라고 말하는 내가 어이없지만 대견하기도 하다.
’ 나를 위로하는 글쓰기‘를 보니까 유서를 쓰는 이야기가 나온다. 유서를 업데이트할 때가 된 것 같다. 항상 이름을 언급할까 말까, 이름을 남기면 평생의 짐이 되는 건 아닐까, 이름이 없으면 내가 소라를 원망하는 것처럼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작별인사가 아니라 편안하게 편지를 쓰는 느낌으로 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