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삶이 함께 할 때
우리는 결혼할 때 혼인 서약을 한다.
예전에는 표준 문구가 있었다. “신랑 *** 군은 신부 *** 양을 아내로 맞이하여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한결같이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신랑 (예! 맹세합니다.)”신부에게도 동일하게 묻는다. 요즘은 개성이 넘치는 다양한 서약이 있다.
신랑: 배가 나오지 않도록 운동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여윳돈이 생겨도 숨기지 않으며 아내 몰래 주식투자는 하지 않겠습니다.
신부: 지금의 건강과 미모를 유지하겠습니다. 돈을 헛되어 쓰지 않고 알뜰히 관리하겠습니다.
삶의 동반자로서 평생토록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 것을 맹세하는 순간이다.
친구와 친지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하고서도 살면서 서로 부딪히면서 싸우기도 한다. 심지어는 갈등을 해결하지 못해 결국 원수가 되어 헤어지기도 한다. 여행을 할 때 함께 가는 동반자와 마음이 맞지 않아서 여행 내내 불편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여행의 동반자는 끝나고 헤어지면 그만이다. 평생의 동반자라고 선서한 배우자는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가능한 서로 맞추어 가면서 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서로 남이 될 수도 있다. 자식들도 언젠가는 독립하고 분가하여 각자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가족은 한 때의 동반자이긴 하지만 평생을 함께 가지는 못한다. 배우자마저도 누군가는 먼저 이 세상을 떠나고 혼자가 된다. 나와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 몸이다. 나의 몸은 내가 좋든 싫든 끝까지 함께 한다.
사실 나의 영원한 동반자이다. 싫다고 헤어질 수 도 없고 보기 싫다고 떨어지는 것은 더욱 곤란하다. 자신의 처지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렇지 않은 한 평생을 함께 간다. 나는 과연 평생의 동반자인 나의 몸을 존중하고 사랑했는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렇지 않았던 같다. 몸을 얼마나 무시하고 함부로 대했는가 돌이켜본다. 젊은 때는 스트레스를 푼다고 혹은 회사의 업무를 한다는 명목으로 알코올을 들이부었는데도 몸은 불평 없이 다 받아 주었다. 그다음 날 숙취로 몸과 마음이 다 괴로울 때는 ‘뇌’가 재빨리 나선다. ‘어제 그 술자리를 통해 얼마나 회사일에 얼마나 도움을 되었는지 아니?’라고 금세 합리화를 한다. 뇌가 보내는 속삼임에 ‘그럼 그렇지’ 하고 불편한 마음이 사라진다.
‘이게 뭐 내 좋으라고 이 고생을 하는 줄 아니? 다 회사와 가족을 위한 일인데..’라고 덧붙인다. 뇌가 전하는 메시지를 그대로 아내에게 전달한다.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의 몸과 마음은 이렇게 늘 함께 하며 고생하면서도 나에게 위로까지 한다. 근데 더 이상 참기가 어려울 때면 못 견디겠다고 신호를 보낸다. 처음에는 통증으로 호소한다. 그때마저도 나는 통증을 무시하고 넘어간다. 그럼 마지막에는 병적 증세를 보이면서 나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립시킨다. 이 주인은 도저히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니 몸이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젊은 시절에 성과를 내기 위해 밤중에도 카페인이나 알코올을 넘치게 마시면서 회사 프로젝트를 위해 일한 적도 있다. 프로젝트 마감 보고서를 쓰면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줄담배를 피워 댔다. 그렇게 몸을 혹사하다가 휴가철이 오면 갑자기 보상심리가 발동된다. 산행을 한다고 지리산을 종주하다가 무릎이 나가고, 추운 겨울 거나하게 정종을 마시고는 호기 차게 노래를 부르면서 길을 걷다가 얼음판에 미끄러져 허리도 나가고, 한 겨울에 무슨 프로선수가 되겠다고 골프를 치다 꽁꽁 얼어붙은 벙커에서 샷을 날리다 팔꿈치 관절이 나가고, 눈을 얼마나 혹사했으면 어느 날 갑자기 내 눈앞에서 거미줄이 계속 보이는 비문증까지 나타나면서 몸은 나에게 경고 신호를 계속 보내왔다.
이제는 내 몸에 사과하고 싶다.
심한 두통으로 인해 내 몸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동안 너무 함부로 굴리고 외면하였다. 몸이 나에게 보낸 최후통첩이었다. 처음에는 고등학교 때, 그리고 군대에서 몸으로부터 경고를 받고 병원에 입원까지 했지만 내 몸을 사랑하지는 못했다. 지난 낙상사고를 통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의 정신을 일깨워준 신호였다. 같이 사는 반려견도 사랑하는데 나의 몸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건강을 잃어버려야 그 소중함을 아는 바보 같은 인간이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 앞에서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나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는 시간이 지나면 또 잊어버린다. 평소에는 그 소중함을 잊고 있다가 상실하고 난 다음에야 후회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운명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지금부터라도 평생의 동반자인 몸을 보듬어주고 싶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잊어버리기 쉽다. ‘고맙다’는 말을 표현하는 것도 어색해한다. 공기처럼 너무나 중요하지만 항상 가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고마움을 놓치기 쉽다. 나의 몸도 마찬가지다. 나와 떨어지고 싶고 외면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사이이다. 이제는 나의 몸을 챙길 시간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몸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