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만에 시험을 보는 건가?
역시 시험은 긴장된다.
오늘은 시험을 치르는 날이다. 아무리 작은 시험이라도 피시험자가 되는 순간 불안하기는 매 한 가지다. 딸들이 대학입학과 취업 시험을 치르면서 초조하게 기다렸던 기억이 어제처럼 느껴진다. 내가 마지막으로 시험을 치른 기억도 거의 30년 전으로 돌아간다.
박사학위 과정의 막바지 최종 학위논문 발표 심사 때였다. 발표와 질의응답을 끝내고 논문 심사위원들께서 최종 논의를 하는 동안 나는 옆 세미나실에 기다리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설마 재심을 요구하지는 않겠지'하면서도 불안했던 마음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난 4년간 학위과정의 연구결과, 아니 대학을 포함하여 대학원까지 모두 10년 간의 노력에 대한 평가를 받는 것이기에 더욱 초조했다.
지금도 그때처럼 시험 순서에 따라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동안 함께 공부하고 훈련한 <핸드드립 홈바리스타> 과정을 수강하는 동료들이 있다. 나이가 지긋한 수강생 한 명은 긴장을 풀기 위해 미리 시험과정을 직접 시연하는 것처럼 순서대로 소리 내어 <여성인력개발센터> 3층 대기실에서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다.
처음 수강신청을 할 때 '여성인력개발센터'라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여성을 위한 인력개발센터인데 남성은 수강할 수 있느냐고? 전화기 저편에서 건조하게 "상관없어세요~"라는 응답을 받았다.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용하는 강좌를 수강하기를 원했지만 해당 강좌가 없어 우선 핸드드립 커피 클래스를 듣기로 했다. 첫 시간, 교실에 들어서는데 예상한 대로 모두 여성들이었다. 30대부터 60대 연령까지 다양해 보였다.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대충 나이를 분간할 수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왠지 내가 있어서는 안 되는 곳에 불쑥 나타난 불청객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단 앞에 있는 선생님과 수강생들에게 인사한 후에 자리를 찾기 위해 보니 뒤쪽에 의자가 비었다.
일단 가방을 내려놓고 주위 분위기를 살피면서 기다리는데 젊은 청년이 들어왔다. 그도 잠시 나처럼 두리번거리다 내 옆에 와서 털썩 앉는다. 순간 동지가 생겨 반가웠다. 한편으로는 유일하게 청일점(?)이 되는 순간이었는데 그 희망이 사라졌다는 아쉬움도 살짝 남았다.
그동안 개인적으로 커피를 즐겨 마셨다. 집에서 자동으로 내리는 머신으로 커피를 즐기다가 어느 날 핸드드립 커피에 맛을 들였다. 아침마다 직접 손으로 분쇄기를 사용하여 커피콩을 갈아서 마시면 구수한 커피 향이 방 가득히 채워쳐서 좋았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을 커피 향과 함께 열고 있다. 이왕에 커피맛에 입문한 터에 기초부터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딸이 2년간 파티시에 공부한 후 자격증을 취득하고 판교에서 디저트카페를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가끔 매장에 방문한다. 아직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손님이 많지 않아 가게에 앉아 내가 좋아하는 마들렌, 휘낭시에, 티그레 등을 먹고 커피까지 즐긴다. 요즘은 크리스마스와 연말이라 피스타치오 프레지에 케이크도 만들면서 바쁘다.
이렇게 바쁠 때면 아내가 가서 알바처럼, 하지만 무보수로 케이크 재료까지 챙겨주면서 도와주고 있다. 나는 커피와 쿠키 맛을 즐기면서 가게 매출에도 기여하고 있지만 나도 뭔가 도움이 될 수 없을까 생각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바쁜 시간대는 딸 혼자서 하기에 벅차 보였다. 물론 주말에는 사위가 와서 도와주고 있지만 말이다.
혹시 비상시에 백업을 할 수 있는 인력이 필요할 것 같았다. 특히 가끔 한꺼번에 손님이 밀려오기라도 한다면 - 그렇게 되면 무지 좋겠지만 - '커피를 내리는 것이라도 도와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예 이번 기회에 체계적으로 커피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고 싶었다. 나도 즐기고 딸이 영업하는데도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바리스타 클래스 8주가 훌쩍 지나갔다. 어제가 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다.
세 번째로 시험장에 들어가서 우선 앞치마부터 입는다. 웬걸.? 긴장을 해서인지 치마 앞뒤를 살피고 있는데 마침 선생님이 등뒤로 와서 입는 걸 도와주었다. “고마워요”하고는 속으로 ‘이런.. 앞치마 입는 것도 헤매면 어떡하지..’
일단 준비물을 트레이에 놓고 테이블로 가서 절차대로 시작했다. 먼저 커피 여과지를 접어 드리퍼 위에 올려놓고 분쇄기에 원두를 넣고 손으로 돌린다. 거기까지는 무난히 잘했다.
열심히 돌리다가 갑자기 잘 돌아가지 않길래 분쇄기를 조금 흔들었다. 그랬더니 뚜껑이 없는 분쇄기라 원두의 일부가 위로 흘러 탁자 위와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 순간,
'헉..!' 소리가
나왔다.
당황했다. 옆에 있는 수강생은 시험장에 함께 들어오면서 ”너무 떨려요~“하던 사람답지 않게 능숙하게 잘 해내고 있었다. 난 쏟아져 내린 분량만큼 다시 원두를 채워 넣어 갈기 시작했다. ‘이건 감점이 클 텐데, 이왕 엎질러진 커피 어떡하지.? 지금부터 잘하지 뭐..!’ 속으로 다짐한 후, 뜨거운 물을 받아와서 서버에 부으면서 식힌 후 본격적으로 드립을 시작했다.
처음 드립은 뜸 들이기였다. 원두 표면을 골고루 적셔 주어 뜸을 들이면서 서버에 물 몇 방울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다. 약 30초가 지나면 1차 추출을 시작하고 뒤이어 2차 추출까지 무난히 끝냈다. 추출된 양이 원래 요구한 200ml만큼 채워졌다. 감독관에게 “주문하신 드립커피 나왔습니다.”라고 어설프게 말했다. 서버에 담긴 드립양을 확인받은 후 시험은 끝이 났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주 긴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꼈다. 시험결과는 1주 후에 문자로 발송된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합격, 불합격을 판정할 수 있는데 왜 기다려야 하지? 수험생이 시험결과를 기다리는 초조함까지 맛보게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원두 일부를 쏟은 것을 제외하면 주어진 요구사항을 만족했으니 설마 '열심히 했는데 떨어뜨리기야 하겠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단지 커피의 기초부터 배우고 싶어 왔다가 오랜만에 시험까지 치르고 나니 뭔가 매듭을 지웠다는 성취감이 들었다. 자격증을 받는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나 스스로에게 칭찬해 주고 싶었다. 내일 아침부터는 제대로 드립 커피를 즐길 수 있다는 작은 기쁨도 있다.
오래전, 도쿄를 여행하면서 어느 드립 커피점을 들렀던 기억이 난다. 나이가 지긋이 든 여성이 내가 앉은 바테이블 바로 앞에서 손으로 커피를 내리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거의 도를 닦는 듯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매일 아침 커피를 손으로 갈고 내리면서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싶다.
이제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내리는 커피를 배우면 된다. 누군가는 '그걸 왜 배우지? 그냥 적당히 유튜브를 보고 하면 되지'라고 반문할 수 있다. 난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기초부터 제대로 배우고 싶은 것이다. 과연 그렇게 될지는 모르지만… 마침 아내가 지역 청소년수련관에서 강좌가 있다고 귀띔을 해 준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벌써 열명 정원에 아홉 명이 수강 신청을 하였다. 놓칠세라 얼른 신청하고 결재까지 완료했다.
1월 2일부터 매주 월요일 오전에 2시간 20분간 한 달간의 수업이다. 그리고 내친김에 <라테아트>도 배우고 싶다.
근처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열리는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는 기초반>도 수강 신청했다. 그동안 마구잡이로 찍었던 스마트폰 영상을 기초부터 제대로 배우고 싶다. 이것도 월요일이고 오후 시간대다.
이번 겨울 방학에도 바쁘게 생겼다.
무엇보다 배우고 익히는 그 과정이 기대가 된다.
어쩔 수 없이 난 범생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