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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개구리의 삶 (44)

친절한 세상

by 촌개구리

결혼하기 전까지 청담동에 살았는데 직장이 있는 무교동으로 출근하려면 신입사원 시절이라 자가용도 없고 그 당시 유일한 교통수단인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출근하려고 버스정류장에 서서 기다리는데 검은색 세단이 내 앞에 서서 뒷좌석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더니 양복 입은 노신사께서 어디까지 가냐고 내게 물었다.


무교동 간다고 대답하자 방향이 같으니 뒷자리에 타라고 해서 순간 인신매매범이 아침부터 나를 노리지는 않을 테고 잠시 망설이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탔다. 뒷좌석에 노신사와 나란히 앉아 무교동까지 편하게 출근했다.


그 후 몇 달간 친절한 노신사 덕분에 복잡한 버스에 시달리지 않고 승용차로 함께 출근하게 되었고 인생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도 들으며 편하게 그것도 빠르게 출근했던 고마운 추억이 있다.


그러다 중고차로 마이카를 마련했고 결혼해서 아내의 직장과 가까운 금천구 시흥동에 신혼집을 마련하여 신혼생활 하던 어느 날 차량정체로 악명 높은 서부간선도로로 퇴근하던 길에 히터를 틀어서 그런지 깜박 졸다 쿵하고 앞차를 박았다.


스스로 깜짝 놀라 내려서보니 앞차는 기아 콩코드로 범퍼에 살짝 기스가 난 정도로 피해가 별로 없었는데 나의 애마 르망은 라디에이터가 터졌는지 수증기가 올라왔다.


앞차는 명함을 주고 보냈지만 레커차는 불러야 오던 시절이라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개인택시 한 대가 뒤에 서더니 트렁크에서 물이 담긴 부동액통을 건네주셨다.


운행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니 라디에이터에 물을 보충하며 집까지 가라고 하는데 너무 고마웠다. 자신도 일전에 사고를 당했을 때 지금처럼 도움을 받아 물을 가지고 다닌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한동안 트렁크에 비상용 물을 가지고 다녔다.


지난주에는 지하 주차장을 통해 단지 내 피트니스센터로 걸어가는데 검은 표범 닮은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주인인 듯한 분이 땀을 뻘뻘 흘리며 모터가 달린 광택기로 광택을 내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얼마 전 아내 차가 마트 주차 중 알 수 없는 흰색차에 앞 범퍼 모서리가 긁혀 스크래치와 함께 흰색페인트가 묻는 손상이 있었지만 범인을 찾지 못해 그냥 타고 다니던 것이 생각나 오토바이 주인에게 광택기를 잠시 빌릴 수 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광택을 내던 오토바이 주인이 선뜻 자기가 직접 해드리겠다며 차가 어딨냐고 해서 주차된 곳으로 이동하여 광택기로 꼼꼼하게 흰색페인트를 제거하고 여러 차례 돌려가며 최선을 다해 사고 전과 비슷하게 만들어 주셨는데 너무 고마웠다. 그래서 다시 집으로 올라가 시원한 음료수를 가지고 내려와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처럼 살다 보면 힘든 일이나 어려움을 당했을 때 생각지도 못한 친절한 사람을 만나서 도움을 받게 되거나 물불 안 가리고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감동적인 뉴스를 접하게 될 때마다 대한민국은 아직 살만 한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상에서도 자주 만나게 되는 장면도 있다. 아파트 현관에서 몸으로 센서를 작동시켜 문을 열어주고 내가 탈 때까지 엘리베이터를 잡아 주는 친절한 이웃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친절은 비용도 들지 않고 전염성이 강할 뿐 아니라 친절을 베풀게 되면 기분을 좋게 하는 호르몬도 배출된다고 한다. 이렇게 서로 미소 짓게 만드는 친절. 나도 작은 것부터 실천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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