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열쇠를 가방에서 꺼낸다
2. 열쇠를 열쇠 구멍에 꽂는다
3. 야심차게 가방에서 드라이버를 꺼낸다
베를린의 오래된 알트바우 하우스에서 내가 문을 열던 방식이다. 열쇠로 문을 여는 아주 간단하고 별것 아닌 일인데, 그때마다 나는 3번을 필수적으로 과정에 넣어야 했다.
열쇠라는 물건의 존재감이 흐릿해진 지는 꽤 오래됐다. 간헐적으로가 아니라 주기적으로 열쇠를 썼던 마지막 시기는 고3 때까지였다. 내가 10대를 보낸 건 지은 지 20년은 족히 넘은 반포의 오래된 아파트였는데,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우리 가족은 동교동의 신식 빌라로 이사를 왔다. 처음에는 도어락을 위로 올려서 번호를 누르고는 다시 도어락을 내렸다. 그러다 도어락의 번호가 4자리에서 6자리로 바뀌었고, 보안 장치를 설치하면서 장치에 카드를 갖다 대는 것으로 방식은 한 번 더 달라졌다. 이렇게 열쇠랑 소원해진 지는 벌써 10년이 넘었다.
‘열쇠와 멀어지기’를 했던 건 회사에서도 마찬가지. 두 번째 회사까지만 카드를 사용했고, 그다음 회사 부터는 입사 첫날에 등록한 지문을 찍는 것으로 문을 열었다. 소지품이 줄어드니 가방 사정은 편해졌는데 빼도 박도 못 하고 출근 시간을 들켜야 한다는 건 참으로・・・. 그나마 카드를 찍을 때는 꾀라도 부릴 수 있었다. 일찍 출근한 한 사람이 나머지 팀원의 카드를 가지고 있다가 순차적으로 찍었다. (주로 막내들이 했다) 투명 테이프에 손을 대고 꾹 눌러 손자국을 남기고 장치에 찍으면 문이 열릴지 늘 궁금했지만 차마 이건 하지 못했다. 해외에서 에어비앤비를 자주 이용했다면 아마 몇 번쯤은 열쇠를 인도받았을 것 같은데 나는 그때마다 호텔과 아파트먼트에서 묵었기 때문에 또 몇 발자국 열쇠와 멀어졌다.
베를린의 집에 도착한 당일은 밤 10시가 가까워진 때라 열쇠를 사용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이튿날, 샤워하자마자 가방을 챙겨서 집 앞 마트로 달려갔다. 눈을 돌릴만한 것이 너무 많았는데, 우선은 당장 먹을 만한 시리얼이나 토마토, 치즈, 햄을 사서 양손에 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이 아파트의 열쇠는 두 개다. 현관문을 여는 네모난 열쇠 하나, 아파트의 각호를 여는 동그란 열쇠 하나. ‘찰칵’ 열쇠가 돌아가고 현관문이 열렸다. 3층으로 올라가서 다시 열쇠를 꽂고 돌렸는데 그때부터 일이 뜻대로 되질 않았다. 열쇠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한 바퀴나 반 바퀴가 아니라 두 번 또는 한도 없이 돌아가는 데 그건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다. 혼자 베를린에 오기 전에 했던 갖가지 걱정에도 이는 없는 상황이었다. 당황해서 짐을 내려둘 생각도 못 하고 10분간 열쇠를 넣고 돌리고 뺐다가 다시 넣고를 반복했다. 아래층에서 인적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나는 짐을 내려두고 그들에게 헐레벌떡 달려갔다. 옆집에 사는 두 명의 여자들이었는데, 그들은 무방비 상태로 노래를 부르며 올라오다가 내가 달려오자 흠칫했다. 우선은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세요.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안녕하세요. 하하.”
둘 다 티셔츠와 레깅스에 러닝화를 신고 있는 걸 보니 둘이 조깅을 한 것 같았다.
“저, 어제부터 이 집에서 지내는데요. 오늘 처음 문을 열었는데 문이 안 열려서요.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당시나 지금이나 부끄러움이 가시질 않는다.
“네. 그럼요. 한 번 해볼까요?”
포니테일 머리를 한 금발의 여자가 열쇠를 넣고 돌렸다. 부팅이 안 되던 컴퓨터가 수리기사의 방문에 거짓말처럼 작동되는 그 상황이 왜 여기서 나와. 마동석이 바닥에서 2kg짜리 덤벨을 드는 것 같았다고 할까. 그녀가 문을 여는 순간은 지극히 간단해 보였다.
두 배로 가중된 부끄러움을 감추고 가까스로 웃으며 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크리스티앙에게서 들은 사실이지만 나는 이 아파트에서 이 사건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 존재감은 열쇠를 열지 못해 옆집 사람들(이번엔 커플)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한 번 더 있었기에 가중됐다.
그날 저녁, 할레에서 돌아온 크리스티앙을 처음 만났다. 간단하고 상투적인 인사를 나누고 어려운 일이 없는지 묻는 그에게 문을 잘못 열겠다고 했더니 그는 함께 연습을 해보자고 했다.
“숙박객들 대부분이 어려워했어요. 괜찮으니까 같이 해봐요.”
그가 먼저 시범을 보였다. 열쇠를 넣고 반 바퀴에서 살짝 들어 올리면서 여는 방식이었는데 능수능란하게 여는 그의 모습을 따라 하는 건 무리였다. 게다가 연습도 연습이지만 그에게 비친 바보 같은 첫인상에 대한 자괴감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몇 차례의 연습에도 수월하게 열쇠를 사용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그는 다시 말했다.
“잠깐만요. 제가 생각이 있어요.”
그는 주방에 있는 검은색 캐비닛으로 가더니 공구함을 꺼냈고, 작은 십자드라이버 하나를 뺐다. 뻑뻑한 문고리를 어떻게 하나보다 했는데 그가 드라이버를 꺼낸 용도는 예상 밖이었다. 그는 같이 다시 현관으로 나가자고 하더니 열쇠를 꽂고 열쇠 상단의 동그란 구멍에 드라이버를 넣고 드라이버를 돌려서 문을 열었다.
“다시 한번 해볼래요?”
우스꽝스럽지만 나는 한 달 내내 이렇게 문을 열었다. 한 번은 방에 있다가 네이버에 ‘독일 열쇠’를 키워드로 검색한 적이 있다. 나처럼 열쇠를 못 열어서 한밤중에 주인을 불렀다거나 밤을 꼴딱 새운 사람들의 후기가 잔뜩 있었다. 열쇠에 기름칠을 하라는 둥, 열쇠를 열면서 문고리를 끌어당겨야 한다는 둥 이런저런 솔루션이 있었는데, 독일의 오래된 건물에서 머무는 사람이라면 드라이버를 하나 가져가 보라고 권하고 싶다.
하루는 일기를 쓰다가 크리스티앙에게 몇 가지를 물어봤습니다. 그는 꼭 인터뷰를 하는 것 같다고 하더니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안녕, 나는 열쇠 전문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