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주소 대로 갔는데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반대로 이미 사람이 있어. 그런데 이중 계약이라면?’ 막상 여행을 떠난다고 질러 놓고 내가 가장 열심히 했던 것은 시시때때로 불안한 가능성을 떠올리는 일이었다. 그 가운데 상당 비율을 차지한 것은 급하게 예약한 집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리고 블로그 포스팅을 자주 검색하면서 걱정에 힘껏 불을 지폈다. 에어비앤비와 관련된 후기에는 호스트와의 좋은 에피소드를 써둔 사람도 많았지만 사기나 범죄에 말려든 사람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급히 결정한 여행이라 신중하게 집을 고를 시간이 없었다. 속성으로 앱에 들어가서 집의 사진을 확인하다 보면 꼭 저녁 8시 15분에 헐레벌떡 백화점 식품 매장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그만큼 다급하게 결정해 버려서 확신이 들질 않았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는 좋은 선택이었다고 여행 내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집에 온 것은 이번 여행에서 했던 선택 중 가장 잘한 일이었다.
독일에는 신축 집을 뜻하는 ‘노이바우’와 오래된 건물을 뜻하는 ‘알트바우’가 있다. 주방이나 욕실을 생각하면 역시나 신식 건물이 안심되지만, 빈티지 알트바우에 대한 로망 때문에 나는 이 집을 골랐다. 이 집은 지어진 지 100년이 훌쩍 넘었다. 약간의 수리를 거치긴 했지만, 겉으로나 안으로나 시간을 가늠할 만큼의 흉터는 크게 보이지 않는다. 대신 오랫동안 집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머물고 떠나길 반복했다는 느낌이 문득문득 든다. 오랜 세월에도 특별히 상한 부분 없이 유지되어 있었는데, 머문 사람들 모두가 사려 깊고 부지런했음에 틀림없다.
물론, 세월이 전혀 무색하진 않다.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옆집 사람들의 대화가 들린다. 그들에겐 유창하지 않은 나의 독일어 실력이 다행이었을지도. 틈새가 일정하게 나 있는 나무 바닥은 밝을 때마다 삐걱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것 때문에 위층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서 그들이 언제 집에 들어오는지도 알 수 있다.
집의 구조는 이렇다. 현관에 들어오면 왼편에는 욕실, 오른편에는 서재가 있다. 그리고 서재 가운데 문으로 들어가면 내가 묵었던 메인룸이 나온다. 서재에 들어오지 않고 그대로 지나치면 오른편에는 LP 플레이어와 소파, 대형 책꽂이가 있는 거실이 있다. 그리고 왼편은 주방. 넓은 주방에서 냉장고가 있는 방향으로 오른편에는 게스트룸이 있다.
이 집의 호스트, 크리스티앙과 일라자는 게스트룸에 묵고 있다. 크리스티앙은 뮤니치에서 태어난 독일 남자다. 할레에 있는 독일 연방 문화재단에서 변호사로 일한다. 예약을 하고 난 뒤에 알게 됐지만 일라자는 나처럼 프리랜서 에디터로 일한다. 줄곧 런던에서 일하다 타센과 계약하게 되면서 베를린에 왔다. 둘 사이에는 다이애나가 있다. 크리스티앙은 옥스퍼드에서 3년 동안 역사와 문학을 공부했는데, 그때 다이애나를 만났다. 일라자는 부모님 덕분에 다이애나를 만났다. 두 사람의 부모님은 동향이라 알고 지냈는데, 베를린에 특별한 연고가 없었던 일라자가 부모님의 권유로 다이애나와 연락을 하면서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다이애나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갈 때쯤 페어웰 파티를 했는데, 바로 이 파티에서 크리스티앙과 일라자가 만났다. 둘은 4년 전부터 사귀다가 일라자의 제안으로, 2년째 에어비앤비를 운영 중이다.
두 사람은 내가 어떻게 많고 많은 집 중에서 자신들의 집을 고른 건지 궁금해했다. 혼자 한 달이나 머무는 만큼 나는 필터에 ‘슈퍼 호스트’를 가장 먼저 넣었다. 그리고 역에서 얼마나 인접한 지, 주인은 어떤 사람인지, 집의 풍경이 어떤지 사진과 사람들의 후기를 통해 확인했다. 그리고는 일정을 채워 넣었더니 이 집이 나왔다.
크리스티앙은 친화력이 아주 좋은 데다가 배려심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문을 열지 못하는 나를 도와줬던 것부터 시작해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나서서 도와주었다. ‘세탁기 세제는 어떤 게 좋아?’라고 물으면 잠깐 나갔다 온다고 하고는 세제를 사다주는 사람이었다. ‘이거 너무 뻑뻑하네?’라고 하면서 실내용 사이클 앞에 있으면 스패너를 가져와서 나사를 헐겁게 풀어줬다. 가끔은 나를 땀 흘리게 만들기도 했다. 독일어 학원에 다닌다는 걸 알고부터는 내가 주방에만 들어가면 단어 테스트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만하면 안될까’라고 하면 ‘이제부터 주방이 연습실이야. 여기 들어오면 단어 게임을 하자. 이게 뭐였지?’라고 하면서 계속 연습을 시켰다.
일라자는 사려 깊고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마주치면서 늘 나의 컨디션을 물어봐 줬는데, 그게 혹여나 상대방 입장에서 부담스럽지는 않은지 충분히 고민한 느낌이 들게 했다. 깨끗하게 세탁된 침구를 미리 준비해두거나 일교차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알려줬다. 그리고 가끔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면 방문 앞에서 깜짝 선물과 메시지를 남겨두었다. 주말마다 두 사람이 가는 파머스 마켓에서 사 온 꽃을 꽂아둔 작은 꽃병이나 미테 앞 베이커리의 시나몬 번을 발견하고 기뻐했다.
두 사람은 여행자 같기도 유학생 같기도 했던 어정쩡한 포지션의 나를 아주 흥미로워 해주었다. 우리는 매일 식탁에서 인사를 나눴는데, 주로 그들의 “오늘 뭘 할 거야?”, “오늘 뭐 했어?”라는 물음으로 시작했다. 처음 2주간은 사실 이 질문에 그날 가기로 정한 동네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긴장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는 글자와 얼굴, 길이 하나씩 늘어날 때부터는 매일 받는 그들의 질문을 기다렸다. 지하철에서 캣콜링을 당하거나 코트부서에서 인종차별을 당한 날의 저녁, 내가 받은 "오늘은 어땠어?”라는 질문은 물음 이상의 의미였다. 그날 밤, 침울한 기분을 설명하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어야 했다면 얼마나 외로웠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PS. 돌아와보니 에어비앤비 후기에 일라자가 글을 남겨두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이렇게 봐주었네요.
Jiyeong stayed with us for a month and she was a really delightful person to have around- courteous, considerate, clean and friendly. We were really inspired by her curiosity for the city and culture and much enjoyed getting to know her. We would warmly recommend Jiyeong as a gu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