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 도착하고 나서 나흘 만에 독일어 학원에 갔다. 학원의 이름은 슈프라헨 아틀리에, U반으로 사마리테르스탈제역 근처에 있다. 베를린에서 만나는 낯선 상황도 말을 배우면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아 3주간 학원에 다니기로 했다. 우선은 지하철역 이름을 독일식으로 읽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사실 지하철역보다는 학원 이름이 더 어려웠지만. 새롭게 이름을 짓지는 않았다. 우리가 헤어지는 순간마저도 수강생 대부분이 ‘영’을 ‘용’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들의 노력을 충분히 받았다.
랭귀지 클래스에서 가장 기초에 해당하는 A1 과정은 두 명의 선생님이 맡고 있다. 월・화・수는 라인하드가, 목・금은 루카스가 들어왔다. 라인하드는 갈색 곱슬머리(파마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에 친근한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통통한 체격에 이너 티셔츠와 체크 셔츠와 레이어드해서 입었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침부터 늘 땀을 흘리며 출근했다. 루카스는 키가 190cm는 족히 되어 보였는데 건강한 체격과는 대조되게 빈약한 숱의 생머리를 가지런히 묶고 왔다. 그는 슬리브리스에 카고 팬츠를 즐겨 입었는데 가끔 비니도 썼다.
둘은 상반된 겉모습처럼 수업 방식도 아주 달랐다. 수업은 연습용과 실전용으로 나눈 2권의 책으로 진행되었다. 라인하드는 교제 2권을 아주 충실하게 활용했다. 연습용 교재로 진도를 나가고, 실전용 책의 숙제를 다음날 확인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루카스는 책을 잘 펼치지 않았는데 단어가 적힌 그림을 복사해오거나 고무줄로 고정한 단어 카드 꾸러미를 자주 가져왔다. 그런가 하면 이들의 숙제는 서로 일일드라마처럼 연결이 아주 잘됐다. 수요일에 내준 라인하드의 숙제를 목요일에 루카스가 확인, 루카스가 금요일에 내준 숙제를 월요일에 라인하드가 확인했다.
월요일. 여행하는 와중에 학원이라니, 꽤 학구적으로 보이지만 정작 나는 인사 말고는 아는 단어 하나 없이 학원에 갔다. 이것이 지나친 패기였다는 건 첫 시간이 5분도 되지 못한 시점에서 직감했다. 라인하드가 들어와서 머리를 만지작거리더니 수업을 시작했다. 칠판에 라인하드라는 이름을 적고 나서 그는 각자에게 소개를 시켰다. 진땀 나는 순간이었지만 알다시피 시계방향 순 말하기는 첫 순서를 제외하면 최소한의 눈치로 어떻게든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다. 첫 위기를 넘기고 나자, 라인하드는 그치지 않고 출신 국가와 거주 도시 말하기를 시켰다. 수업은 오로지 독일어로만 진행되었기 때문에 나는 1주일이 지날 때까지 책상 아래에서 재빠르게 휴대폰으로 단어를 검색했다.
혹여라도 누군가 헤맨다 싶으면 복슬강아지처럼 곁으로 와서 친절하게 영어로 설명해주는 라인하드에 반해, 루카스의 수업은 언제나 긴장 상태로 들어가야 했다. 그는 “No English. Deutsch!”하면서 펠트로 만든 공을 던졌다. 그 공을 받게 되면 무조건 질문에 답해야 해서 혹여라도 공을 받게 될까 봐 일주일간은 공격수 뒤에 숨어다니는 피구 경기의 최약체처럼 공을 피하려 애썼다. 얼추 매뉴얼대로 따라가는 교재식 수업 사이에 책에 없는 예문 만들기를 시킬 때는 “나 시키지마. 제발.”하고 몇 번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는지・・・.
그런데 예상외로 알파벳이 칠판에 적히질 않았다. “Ich mag・・・”, “Ich Kann・・・”과 같이 “나는 좋아합니다.”, “나는 할 수 있다” 류의 문장을 적고 말할 때까지 이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어찌 됐건 이렇게 도망만 다닐 수가 없어서 집에 돌아오면 저녁마다 유튜브를 켜서 아베체데부터 읽기를 시작했다. 위안을 받기 위해 혼자 반대의 상황을 가정하며 기운을 낸 적도 있다. 라인하드가 ㄱ, ㄴ도 모르고 “이거 실화냐”를 하거나 루카스가 히라가나도 모르고 “반짝반짝 빛나는”을 발음하는 모습이란・・・
수업이 끝나고 디아나를 만났다. 디아나는 이탈리아에서 커뮤니케이션학을 전공한 학생인데, 독일어를 배우려고 2년 전에 이 학원에 왔다가 지금은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대체 아베체데가 아니라 어떻게 ‘나는 좋아합니다’를 먼저 배울 수 있어?”라고 물었는데 그녀는 내 질문을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게 이상해?”
“음. 자기소개 까지는 모르겠지만 꽤 많은 문장을 만들었거든. 그런데 아직도 아베체데를 안 배웠어. 안 이상해? 우린 A1인데?”
“내가 여기 처음 와서 홈스테이하다 들은 거지만, 문화적 차이 아닐까. 여긴 뭐든 실전이야. 유치원에 가도 그건 마찬가지라고 들었어. 독일은 아이를 생활 속에서 경험하도록 가르치거든. 아마 거기서 시작된 게 아닐까?”
고통스러웠던 3주를 떠나보내고 나니 이제는 에스체트(수학 기호 베타 처럼 생긴 글자)나 움라우트(위에 점이 있는 글자)가 있는 지하철역도 심호흡 한 번이면 읽을 수 있다. 철자도 모르는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에 다시 떨어진다면 아마 이번처럼 무방비 상태로 갈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대책 없이 가는 것 때문에 무언가 시작이 되는 것일지도・・・.
고난에 빠졌던 주간이 지나고 다시 돌아온 월요일, 라인하드는 아베체데를 칠판에 적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수업이 끝나고 용기 내어 물었는데, 지난주 수요일쯤 하려다가 까먹었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