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한 즉흥적인 것에 맡겨보고자 별다른 계획 없이 베를린에 왔지만 그럼에도 한국에서 미리 확인했던 4가지가 있다. 왕복 항공 스케줄, 아파트먼트, 독일어 학원 그리고 발레 스튜디오 ‘모션스 탄츠’의 사이트.
한국에서 발레를 시작한 지는 석 달이 지났다. 매몰차게 내버려 둔 몸을 더는 외면할 수가 없어서 운동을 시작할 겸 새우등 자세도 교정할 겸 시작했다. 이력서를 쓰듯이 기간 같은 건 차치하고서 운동 경력을 쓴다면 나는 꽤 많은 칸을 채울 수가 있다. 누가 봐도 근육이 빈약한 데다가 운동 신경도 형편없는 것을 고려한다면 극히 의외라는 것이 문제겠지만. 볼링, 수영, 요가, 필라테스, 피트니스, 또 뭐가 있더라. 물론 경력이 있는 것과 그것을 수준급으로 해내는 것은 아주 큰 거리가 있다. 여하튼 이런저런 운동을 간만 보다가 발레를 시작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2년 정도 배운 경력이 있지만, 그 뒤로 쉬었던 20여 년은 형편없는 운동 신경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다리 스트레칭을 하면서 배와 다리가 언제 맞닿을지 여전히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무엇보다 재미가 있다. 운동하지 않고서는 몸이 근질근질한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나처럼 소파에 눕는 것으로도 에너지가 채워지는 사람이라면 운동의 재미 요소는 중요할 수밖에.
모션스 탄츠는 내가 지내는 베를린의 아파트먼트에서 U반으로 20분 거리에 있다. 건물의 주차장을 가로질러서 웬 공장 같은 회색 빌딩 사이에 있어서 처음엔 주변만 서너 번을 왔다 갔다 거렸다. 주소에 B1이라고 적혀 있어서 지하 1층인 줄 알았지만, 회색 빌딩들에는 A1, A2 같은 건물의 일련번호가 적혀 있었다. 여차저차 해서 간신히 도착한 스튜디오에서 나는 갈 때마다 에피소드를 만들었다. 한 번은 데스크에서 오픈 클래스의 비용을 내고 나서 탈의실에 갔던 순간이다. 데스크 직원이 “여자는 두 번째 문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으시면 돼요.”라고 했는데, 나와 직원의 두 번째에 대한 개념이 달랐다. 그녀는 오른쪽에서 두 번째, 나는 왼쪽에서 두 번째를 생각했다. 물론 여성용이 ‘Damen’, 남성용이 ‘Herren’이라는 간단한 단어 정도만 알고 갔어도 문제가 없었겠지만 나는 그렇게 남성용 탈의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탈의실에 들어오는 애덤 러바인을 닮은 남자를 놀라게 하고는 여성용 탈의실에 무사히 입성했다.
또 한 번은 동전과 관련한 일화. 모션스 탄츠의 첫 번째 클래스를 듣는 학생은 7유로를 낸다. 이 금액은 자신에게 클래스의 난이도나 선생님과의 호흡이 맞는지 테스트할 기회를 주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비용이다. 그리고 두 번째 수업을 들을 때부터 12유로를 낸다. 수업료는 현금으로만 받는데, 이 학원은 20유로를 낼 때마다 난색을 표했다. 첫 번째 수업에서는 잔돈이 있어 다행이었지만 두 번째 수업에서는 있는 대로 잔돈을 끌어모았다. 데스크의 직원은 “아아, 11유로라도 없을까요? 아니면 10유로라도요”라고 주위를 살피면서 조용히 속삭였다. 다행히 겨우겨우 모은 동전으로 11유로를 채웠다.
내가 듣는 수업을 담당하는 건 ‘요 시스카’라는 남자 선생님이었다. 시스카 선생님은 키가 160cm대 중반 정도 되는 것 같았고, 몸에 피트 되는 블랙 슬리브리스와 타이츠를 신고 있었다. 슬리브리스 사이로 나온 팔에는 야무지게 잔근육이 모여 있어서 아주 탄탄한 인상을 줬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불그스름한 얼굴은 ‘뽀빠이 이상용’을 닮았는데, 한국인 학생이 나밖에 없어서 이 의견을 인정받지 못한 것이 여태 아쉽다.
보통 발레 수업은 1시간 30분 정도로 진행한다. 매트에서 하는 스트레칭, 바 수업, 센터 수업으로 각각 30분씩을 채우는데 이 방식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시스카 선생님은 매트에서 하는 스트레칭 대신 일종의 명상을 시켰다. 한 번은 수업 전에 학생들에게 매트와 스트랩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두 다리를 세운 채로 매트에 누워서 스트랩으로 다리를 묶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정면에서 한 번, 양쪽 측면에서 한 번씩 몸의 긴장을 풀었다. 스트레칭과 근력으로 혹독하게 30분을 보낸 한국식 수업의 방식이 아니라 적잖이 당황스러웠는데, 시스카 선생님은 이 명상의 방식을 매번 바꿨다. 한 번은 스튜디오에 웬 인체 뼈 구조가 있어서 놀란 적이 있다. 그날은 수업 전에 모두에게 딱딱한 나무 의자를 밖에서 가져오라고 시켰다. 시스카 선생님도 의자에 꼿꼿이 등을 펴고 앉아서 구조물을 어루만졌는데, 뒷목 가장 위쪽의 뼈를 눌렀다. 그리고 우리에게 목을 숙였다가 뒤로 젖혔다가를 반복시키면서 눈을 감게 했다. 이 동작은 사무실에서 일할 때마다 쓰는 근육을 풀어주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우리의 주변을 돌면서 각자 손으로 긴장된 목의 뼈를 만지게 했다.
고요하고 간단한 명상 수업이 끝나고 이어가는 시스카의 바 수업은 명상과는 상반되게 아주 역동적이었다. 바를 사용할 때, 한국에서는 보통 바 바깥쪽의 다리를 쓰고, 다시 반대편 바로 이동해서 바깥 쪽의 다리로 동작을 완성한다. 시스카 선생님은 바깥쪽 다리를 쓰고는 몸을 뒤편으로 돌려서 쉬지 않고 바로 반대편 동작까지 연결될 수 있도록 가르쳤다. 그때마다 음악에 맞춰서 ‘Turn, Turn’을 아주 신나게 해서 나도 모르게 텐션이 저 끝까지 치밀어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를 치우고 나서 하는 센터 수업은 아주 우아했다. 어려운 동작은 없었지만, 최대한 몸의 곡선과 팔 뻗는 각도를 부드럽게 하도록 했다. 수업이 끝나면 스튜디오를 나가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눈을 맞추며 웃었는데, 그 부드러운 인상을 생각하면 여전히 기분이 좋아진다.
제가 다니는 한국의 발레 학원에서 레벨 1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이렇습니다.
A 선생님: 스트레칭과 근력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수업-> 스튜디오에 울려 퍼지는 곡소리
B 선생님: 동작 하나하나를 마킹할 때까지 맨투맨 체크-> 난이도 최상
C 선생님: 천천히, 유쾌하게 바와 센터 수업 진행-> 죽음의 복근 운동과 머리가 핑 도는 점프 반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