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시렵니까.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미래의 저에게 세이브 원고를 줄 만큼 말이죠. 중간중간에 목화레터를 올릴까 했는데, 그러면 제가 쉬는 이유가 없어져서 최대한 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감명받은 문장이 있습니다.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나온 문장입니다.
p.145-146
“잘 쓸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규칙을 따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잘 쓸 자신이 없다면’이라는 구절이다. 문장의 요소들에 대하여 기초적인 이해조차 못한 사람이 과연 자기가 잘 쓰고 있는지 어쩐지를 알 수 있을까? 자기 솜씨가 형편없다면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다. 기본적인 문법은 이해한 사람들은 문법이라는 것이 실은 매우 간단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도하게 마련이다. 문장에는 이름을 표시하는 명사와 동작을 표시하는 동사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p.172
첫째, 좋은 글을 쓰려면 기본을 (어휘력, 문법, 그리고 문체의 요소들을) 잘 익히고 연장통의 세 번째 층에 올바른 연장들을 마련해둬야 한다. 둘째, 형편없는 작가가 제법 괜찮은 작가로 변하기란 불가능하고 또 훌륭한 작가가 위대한 작가로 탈바꿈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스스로 많은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고 시의적절한 도움을 받는다면 그저 괜찮은 정도였던 작가도 훌륭한 작가로 거듭날 수 있다.
그러니까 이제 저는 어휘와 어법 같은 기본적 토대를 잘 쌓아놓아야, 자신의 글을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는 것이겠죠. 그래서 좀 웃기긴 하지만 한국어 능력 시험을 다시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시험을 언제 치를지 모르겠지만, 현재 제가 글을 쓰는 시점으로는 아직 면접 결과 등 구직 활동의 결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서문이 길었네요. 오늘은 제가 그동안 100일 글쓰기를 하면서 써놓았던 글 몇 편을 보여드리겠습니다. 100일 글쓰기란, 말 그대로 100일 동안 매일 놓지 않고 짧은 글 몇 편을 쓰는 것입니다.
무인도에 도착한 지 일주일째 같은 소포만 도착하고 있다.
짭조름한 바다 내와 섞여 들어오는 유리병 속 편지이다. 바닷물이 섞여 들어가, 상태가 매일 조금씩 다르다.
그래서 나는 마치 일정한(진정한 물리적 의미의) 뉴스레터를 구독한 것처럼 유리병 속 편지를 들여다보고 있다.
먹을 것이 점점 떨어져 가고 있다. 그래서 hp가 떨어진 롤플레잉 게임의 주인공처럼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을 멍하니 바라본다.
짠 물과 섞여 나름 야무지게 올려 입은 검은색 플레어스커트는 걸레짝이 된 지 오래요, 위에 입은 크롭탑 티셔츠와 카디건은 그저 부족장의 옷과 같이 변해버렸다.
매일 나는 거대한 여장군처럼 최선을 다해 식용되는 물과 과일들을 구한다.
턱에 주룩주룩 흐르는 코코넛 워터를 모래가 잔뜩 묻은 손가락으로 닦아낸다.
마지막 코코넛 워터 한 방울은 버석한 모래 덩어리인지 물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사람이라는 게 참 웃기게도, 유리병 속 편지가 계속 도착하니 희망이라는 게 생긴다.
편지에는 매일 같은 글자가 쓰여 있다. “거기서 올 때 맛있는 거 사와!” 삐뚤빼뚤한 글씨는 영락없는 아이의 글씨다.
나는 덕분에 무너지지 않고 있다. ‘거기서’ ‘올 때’ ‘사와’라는 말이, 다시금 내가 살던 곳으로 갈 수 있다는 맹랑하고 근거 없는 희망을 품게 한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는 아우슈비츠라는 말이 되지 않는 처참한 곳에서 생의 의지와 희망의 중요성에 대해서 열변하는 구간이 있다.
매일매일 해가 지는 일몰의 시각에 맞춰서, 아무런 희망과 낙관이 지고 있다가 이 알 수 없는 유리병이 무인도에 도착할 때마다 다시 해가 뜨듯이 나에게 작은 희망이 피어오른다.
그 시간만 되면 유리병이 섬의 어느 면에 닿을지 모르니, 광인처럼 긴 머리를 흔들며 뛰어다닌다. 그 끝에 발견한 편지는 일종의 도파민이고, 무료한 이 삶 속의 하이라이트다.
내일은 배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괜찮다는 말을 자주 한다. 사실 별로 괜찮지 않을 때도 괜찮다고 말한다.
이는 상대방을 안심시키기 위한 하얀 거짓말이다. 하지만 상대방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나를 위할 때가 더 많다.
가령 예를 들어, “목화야,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너는 괜찮아?” “괜찮아.” 이런 이야기 오간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서 나의 “괜찮아.”라는 표현은 실제로 정말 괜찮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상대방에게 괜찮게 보이기 위해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는 괜찮다는 일종의 최면을 나에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괜찮지 않음’을 알아봐 주는 이를 좋아한다.
나를 관찰을 많이 하는 친구들은 내가 좋지 않은 상태를 금세 관찰하고 나를 들여다본다. 그래서 그들 앞에서는 내가 가장 자주 하는 거짓말이 무용지물이 된다.
그렇게 거짓말이 의미가 없어지면, 푸스스- 한 번 웃고 행복해진다. 그러면 정말로 나는 괜찮아지는 것이다.
친구들 앞에서는 하늘은 푸르고, 강물은 맑고, 해는 뜨고, 그냥 원래 그런 것은 그런대로- 살아진다.
목화에게.
벌써 더운 여름입니다.
우리는 추운 겨울을 다 보내고, 겨울에 있던 이들을 모두 보내고 묻어주었습니다.
혼자됨을 즐기고, 소중히 여겼으면 좋겠어요.
떠남에 아파하지 말고, 새로움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요즘 스스로에게 안녕을 많이 묻는 날입니다.
가장 우선적으로 잘하고 있다고 해주고 싶습니다.
더 많은 문장을 바란다면, 당신은 당신밖에 해낼 수 없는 유일무이한 일들을 해내고 있다고요.
스스로에게서 효능감을 느끼고, 만족감을 느끼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은 충분히 해내었고, 하고 있으니까요.
당신의 따스함으로 자신을 감싸주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