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박 깜박"
큰 대로변 건너편 갓길에 차를 세우고 비상등을 켰다. 직장과 집 사이 딱 가운데 지점에 그의 사무실이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퍼즐을 맞춰 놓은 것 마냥 우연은 그렇게 필연을 만들었다. 퇴근길 시동을 켜고 엑셀을 지긋이 밟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렸고 그는 매일 다른 말로 나를 현혹했다.
ㅡ가는 길에 얼굴이나 보고 가.
ㅡ눈치 보이지 않아?
ㅡ니가 와야 나 일찍 퇴근한단 말야. 나 좀 살려주라.
우리는 운전석과 조수석을 사이에 두고, 어느 직장에든 꼭 존재하는 개념없는 인간들을 씹다 정이 들었다. 해질녁 노을이 빨갛게 사방을 물들이는 사이 둘 사이의 간극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스며들었다.
차에서 내리며, 이번주 토요일에는 광주에 가자고 말했다. 창문을 스르륵 내리고 다시 물었다.
ㅡ광주는 왜?
ㅡ크리스마스잖아. 난 노팀장님 차타고 금요일에 갈거야. 그냥 버스타고 와. 그날은 특별히 내가 터미널로 마중 나갈게.
창문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와 부딪혔다. 자기말만 하고 그는 4차선 도로의 맞은 편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거절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은 채.
그는 차가 없었다. 그를 만날 때면 아주 작은 하늘색 마티즈를 타고 내가 그를 데리러 가야했다. (결혼 후 남편은 내게 신상 올뉴모닝을 건네주고, 5년동안이나 나의 마티즈를 탔다. 181cm 장신의 그가 마티즈에서 내리는 것이 한동안 적응이 안 될만큼.)
이상했다. 뭔가 바뀌어도 단단히 바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뭐가 딱히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그런데 억울한.. 매번 외제차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차라는 걸 타고 집앞까지 데리러오는 남자들만 만나다가 이 남자를 만나니 오히려 책임감이 느껴졌다.
햇빛에 바싹 마른 잠옷과 속옷을 건조대에서 꺼내 팔에 걸쳤다.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습한 화장실에서 바지를 한껏 말아올려 바닥에 닿지 않게 입으려고 한쪽 발을 밀어넣는 순간 진동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젖은 머리칼은 얼굴에 붙어 시야를 가렸고, 등줄기에선 땀이 다시 솟아났다. 아이러니하게도 난 이런 순간 독립이란 걸 하고 싶어진다. 이유는 단하나! 샤워하고 당당하게 맨몸으로 나와 문 밖에서 뽀송뽀송한 잠옷을 입고 싶어서.
보지도 않고 통화버튼을 누르려다 순.간. 멈칫했다. 이름이 뜨지 않는 전화번호였다. 11자리 숫자가 낯설지 않았다. 잊으려했지만 나의 기억은 다시 뿌연 연기를 지우고 선명하게 떠올랐다. 불을 끄고 침대에 기대 앉았다. 무릎을 두 손으로 감싸고 앉아 물끄러미 전화기를 바라봤다. 사각의 조그만 기계가 내뿜는 불빛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전화는 쉬지 않고 울렸다. 그 아이와 함께 한 커플폰이었다.
처음 만난 건 대학 3학년 때였다. 당시 내 옆엔 다른 남자가 있었고, 그런 나를 2년동안 물끄러미 바라만 본 녀석. 욕심내지 않았고, 표현했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했다. 대학 졸업후(그 아이는 군대제대 후) 길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고, 그 만남은 우연이 아닌 그 아이의 무모한 기다림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랑을 시작했으나, 곧 나는 노량진에 가야했고 지루한 2년의 시간을 또 다시 온전히 기다려준 사람이었다.
스물여섯, 합격통지서를 받아들고 다시 그에게로 갔다. 나는 직장인이 되었고, 그는 취준생이 되었다. 처음에는 시시콜콜 사회초년생이 겪어야하는 어려움과 어이없는 실수들, 그가 보기엔 자칫 배부른 이야기이자 공감해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눈치없이 쏟아내다 어느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 때부터였다. 더이상 둘 사이에 진실된 이야기가 오가지 않게 된 것이... 가장 힘든 건 서로의 세계를, 서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그가 '자신'을 위해 시간을 쏟는 대신 '나'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숨막히기 시작했다. 잔인한 크리스마스, 나는 그에게 일방적인 이별을 고했다.
그 일이 있고 꼬박 2년이 흘렀다.
ㅡ잠깐 나와.
ㅡ나 지금 만나는 사람 있어.
ㅡ나올 때까지 기다릴게.
ㅡ이 시간에 못 나가는 거 알잖아. 부모님 아직 안 주무셔.
ㅡ몰라. 이제 니 사정 따윈 안 봐줄 거야. 나와.
ㅡ뚜두두두두둑.....
미련한 사람이었다. '나가야만 한다.' 생각만 하다 두 시간이 흘렀다. 창밖에선 날 선 바람소리가 들렸다. 가만가만 방문을 열고 안방 문에 귀를 가져다댔다.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뒷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맨발로 슬리퍼를 신고 현관문을 열었다. 도어락 볼륨을 최소로 줄여놓은 건 신의 한 수였다.
현관을 나서자 꽁꽁 언 채 그가 서 있었다.
ㅡ나 두산 합격했어. 그 말 하려고 신입사원 교육끝나자마자 달려왔어.
ㅡ.......
ㅡ나 한 번만 안아줘.
ㅡ.......
차가웠다. 그의 차가운 볼과 입술이 내 살과 맞닿았다.
ㅡ너 없이는 안 될 거 같아. 죽을 거 같아.
ㅡ.......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침 출근길 원재에게 문자를 보냈다.
ㅡ미안해....좋은 여자 만나....
>>>>>>>다음 편에 계속.............
[아무튼, 결혼]
아무튼 시리즈를 좋아해서 어떤 이야기를 엮어볼까 고민하다가 저희 부부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연애소설로 만들어보았습니다. 2년 전에 조금 써둔 원고의 먼지를 털어 세상 밖으로 꺼내놓았고, 올해 완결을 목표로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많이 사랑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