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보다 다정함이 때로는 더 잔인하다

인간실격

by 정강민

"너, 각혈했다면서?"

호리키는 내 앞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자마자 그렇게 말하더니 그때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다정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다정한 미소가 고맙고 기뻐서 저도 모르게 얼굴을 돌리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 다정한 미소 하나에 저는 완전한 인생의 패배자가 되어 매장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이 문장의 핵심은 폭력보다 더 잔인한 ‘다정함’입니다.

요조에게 호리키는 구원자가 아닙니다. 그는 요조를 퇴폐의 세계로 이끌었고, 함께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지만, 요조는 단 한 번도 그를 진심으로 좋아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리키가 보여 준 그 다정한 미소는, 요조가 끝내 버텨 온 마지막 방어선을 무너뜨립니다.


왜냐하면 그 미소는 요조를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라, 이미 망가진 존재를 안심하고 연민해도 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표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요조는 더 이상 숨길 수도, 연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괜찮다”라는 위장이 완전히 벗겨진 것이죠. 그래서 요조는 울고, 동시에 패배합니다.


그 다정함 앞에서조차 상처받는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아직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끝난 사람’이 됩니다. 그 미소 하나로, 요조는 스스로에게 회복 불가능한 판결을 내려버린 셈입니다.


이 장면 이후 요조가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곳은 그가 무너졌기 때문에 끌려간 장소가 아니라, 이미 패배를 받아들인 인간이 스스로 걸어 들어간 종착지에 가깝습니다.


요조에게 호리키의 다정한 미소는 위로가 아니라, “너는 더 이상 저항할 필요도 없는 사람”이라는 무언의 선언이었고, 그래서 그 미소는 칼보다 깊게 요조를 베어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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