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생'을 꿈꾸지만 '파우스트'처럼 보인다.

고구마 향이 달콤하다.

by 정강민

고구마 향이 차안에 펴진다. 달콤하다. 눈물이 찔끔 난다.

직장인이든 프리랜서든 작가든 백수든,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아침은 평일과는 다른 기분이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이 날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일요일이 되면 기분은 축소되었다. 현재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지만 아니 불만스럽지만, 얽매어 있지 않은 생활을 몇 년째하고 있다. 오늘은 토요일 아침, 오늘점심은 외식을 결심했다. 외식이라야 김밥을 사서 차 안에서 먹는 것이다. 식당에서 마스크 벗는 게 아직 부담이다.


가끔 아내가 고구마를 삶는다. 오늘 아침에도 고구마를 삶았다. 두 개 가지고 가라는 것을 하나만 챙겼다.

“아침에 많이 못 먹어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고구마를 비닐봉지 넣었다. 뜨거움에 봉지 안에 김이 차서 봉지를 닫지 않고 차를 탔다.


도서관까지 운전하며 가는데 달콤한 고구마 향기가 나는 게 아닌가. 보통 삶은 고구마에서는 이런 향이 잘 나지 않았는데......, 차안의 밀폐된 공간에서 고구마는 자신의 향기를 드러냈다. 익히 알고 있는 고구마 향이었지만 너무나 달콤했다. 순간 아내가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말 한마디 안했는데.......,



우리는 알고 싶어 한다. 이유는 다양하다. 일단 세상살이에 불안감 때문이다. 배워야 굶지 않고, 집을 사며, 옷을 입고, 병을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진리에 대한 근원적 목마름이다. 보통 사람들은 두 번째 욕구를 잘 인식하지 못해 첫 번째 이유만을 든다.

하지만 첫 번째 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한 사람도 뭔가 배워야 한다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욕망한다. (물론 첫 번째 욕구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 명분은 이 상황을 유지하려면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리에 대한 근원적 목마름일 수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주인공 파우스트는 모든 지식을 섭렵했지만 그는 여전히 우울과 환멸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모든 것을 알아도 여전히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다. 앎의 두 번째 이유인 진리에 대한 근원적 욕구로 보인다.

박지원의 <허생전>에서 허생은 책만 읽다가 아내의 바가지 때문에 세상에 나와 매점매석으로 큰돈을 번다. 허생은 진리에 대한 근원적 욕구에서 시작했지만 현실을 바라보는 냉철한 시각으로 큰돈을 번다.


나도 세상살이에 대한 불안감으로 책을 읽고 쓰기 시작했다. 세상살이에 대한 불안감이 해소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 세상의 시작과 끝, 나의 시작과 끝 등이 궁금했다. 책을 모조리 읽고 싶었지만 기본적으로 난독증이라 느렸고, 또 다 읽는다는 것은 무리였다. 요즘도 그렇지만 불쑥불쑥 진리는커녕 권태와 좌절감만 증폭되기도 한다. 하지만 진리에 대한 근원적 목마름은 본능같다. 해소하기 위해 오늘도 걷는다. 나는 허생을 꿈꾸지만 파우스트처럼 보인다. 이런 내가 스스로도 한심해 보일 때가 많다. 아내는 오죽할까?


삶은 계란과 삶은 고구마는 세상살이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또 진리에 대한 근원적 목마름을 채우기 위한 도구다. 우리가 알게 되는 과정이든 성취하는 과정이든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주변의 도움 없이 되는 것은 없다. 세상살이도 잘하고 싶고, 근원적 진리도 채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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