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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도구

- 종이는 살아있다!

by 강호

우리는 지금 디지털 혁명의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인공지능 시대의 초입에 있지요. 산업혁명보다 더 놀라운 인공지능 혁명을 목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보는 더 빠르게 이동하고, 기억은 외주화 되며, 사유는 화면 속에 압축됩니다. 이런 시대에 종이라는 매체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그냥 시대에 뒤처진 도구 아닐까요?


정보의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종이는 디지털 기술을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속도나, 접근성, 저장 용이성 면에서 종이는 디지털에 밀릴 수밖에 없지요. 저는 예전에도 칼럼에서 ‘페이퍼리스’를 추구해 왔다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사용했던 종이 다이어리를 구글 다이어리와 구글 문서로 대체한 지 벌써 수년이 지났습니다. 회사에서도 가급적이면 문서나 자료를 프린터로 출력하지 않습니다. 대신 PDF를 이용해 컴퓨터나 태블릿 pc에서 화면상에서 읽고 업무를 마치려 합니다. 노트북 LM이라는 인공지능 웹앱에 유튜브 나 웹의 링크를 넣으면 잘 요약해서 읽기 좋게 만들어 줍니다. 한국어로 팟캐스트까지 만들어주니 훨씬 효율적으로 학습할 수 있지요. 효율성이 배가되는 것입니다. 효율성을 기준으로 한다면 종이는 설 자리가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종이만의 장점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최근 국제 학술지의 한 연구에 따르면,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타이핑보다 뇌의 연결성을 더 많이 자극하며 기억력 향상에도 기여한다고 합니다. 물론 손으로 글씨를 쓰는 메모를 디지털 상에서도 못할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종이에 사고를 정리할 때, 우리의 뇌는 보다 활발하게 작동합니다. 디지털은 빠르지만 깊이는 얕고, 종이는 느리지만 사유의 굴곡을 따라갈 수 있는 매체거든요. 종이 위의 메모는 우리를 멀티태스킹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정서적으로도 종이의 단순함은 우리로 하여금 전자적인 속도에서 빠져나와 인간적인 집중과 마음의 호흡을 되찾게 하니까요.


요즘 저는 생각을 정리하거나 깊이 있는 통찰이 필요할 때 디지털 기기를 멀리합니다. 손으로 메모하며, 종이신문에서 가위로 오려낸 종이 자료를 펼쳐놓고 조용히 사유합니다. 화면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종이 위를 ‘걷는 듯’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행동을 일종의 ‘명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시간은 아이디어를 낳고, 내면의 복잡함을 정리해 주니까요. 정보는 디지털에서 얻지만, 통찰은 종이에서 비롯된다고 할까요.


인공지능 시대에 종이는 ‘느림의 도구’가 될 것 같습니다. 정보의 속도 경쟁에서는 디지털이 앞서겠지요. 그러나 우리를 깊이 사고하게 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종이가 빛을 발할 것입니다.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종이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다”라고 말했습니다. 인류 문명을 가능하게 한 종이의 정보 축적 기능을 찬양한 말일 것입니다. 그 발명품은 앞으로도 여전히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의 지위를 누릴 것입니다. 인류 문명의 붕괴나 인류의 존속을 위한 놀라운 도구로서 기능하겠지요.


종이가 주는 느림의 시간이 우리를 평화롭게 합니다.

책상 위에 종이 한 장과 만년필 한 자루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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