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모와 자식이 사이좋게 지내는 법
생각보다 자녀와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아버지들이 주변에 꽤 있습니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제가 자랄 때 학교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아버지와 사이가 좋다는 친구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습니다. 원래 부자지간은 그렇게 냉랭하고 무덤덤하고 때로는 약간의 증오를 동반하는 관계를 유지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아, 그게 사랑이었구나, 알게 되는 그런 사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지요. 요즘은 각종 SNS를 통해 그보다 더 심각한 수준의 부모자식 관계를 보게 되기도 합니다.
제 아이와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으로부터 한 20년 정도 전에, 제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나름의 자녀 양육 철학을 정리했습니다. 돌아보면 그때 그렇게 한 것이 참 다행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생각이 아주 단순하고 조악했지만요. 조금 정리해 볼게요.
저는 우선 아이들과 평생 사이좋게 지내려면 아이가 어렸을 때 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책에서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릴 때는 엄하게 키우고 조금씩 커갈수록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생각처럼 완전하게 그런 철학을 지키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꽤 노력을 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사실 아이가 부모를 잘 따르는 어린 아기일 때는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럽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자칫 너무 오냐오냐 키우기가 쉽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왕자님처럼 키우고 싶지요. 그런데 그때 아이에게 감사, 절제, 공경, 우애 등을 가르치지 않으면 그 이후가 힘들어집니다. 어릴 때 그런 덕목을 배우지 않고 아이가 어느 정도 크고 나면 자신의 본능에 따라 행동하려고 할 때 어른들이 아무리 말을 해도 잘 제어가 안되거든요.
어릴 때 엄격하게 대했다면 아이가 점차 커가면서는 시시콜콜한 잔소리를 점점 줄이고 오히려 아이들의 관심사에 대해 질문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쪽으로 방향을 틀기로 했습니다. 그게 아이에게도 좋고 제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았거든요. 실제로 그랬습니다. 젊게 살게 되더라고요. 디지털 문화나 SNS, 그밖에 젊은이들이 잘 아는 트렌드들이 있잖아요. 아이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관심을 갖다 보면 주워듣는 게 많아집니다. 그런 걸 알게 모르게 습득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저는 또 이런 철학이 있었습니다. 아이에게 공부하라는 말만 안 해도 부모와 자식 간에 틀어질 일은 없다고요. 그래서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부터 고3이 될 때까지 공부하라고 강요한 적은 없습니다. 또 공부를 못했다고 나무란 적도 없습니다. 책을 안 읽거나 일찍 잠자리에 들지 않는 것, 거짓말하는 것, 이런 것으로는 호되게 야단친 적이 있지만요.
지인들에게는 여러 번 제가 가진 생각을 피력한 적이 있고 여러 글에서도 조금씩 언급한 적이 있는데요. ‘좋은 대학을 들어갔다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채근하지 않았습니다.(요즘은 인공지능이 엄청나게 발달하고 있어서 지식을 외우는 공부가 점점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소위 ‘명문대’라는 곳을 갈 필요가 없다거나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명문대’를 나온다는 것은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좋은 ‘브랜드’를 하나 걸치는 것이기에 꽤 효용이 높은 일이지요. 하지만 그런 브랜드를 위해 초중고 12년, 아니 유치원까지 포함해 그 이상을 온통 공부에 투여하는 것은 그리 현명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딱 그 정도로 아이들에게 대학의 효용을 설명했지요. 물론 그렇다고 아이들을 방치한 것은 아니고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거나 할 때에는 꽤 엄하게 나무라기도 했습니다.
이제 아이들은 둘 다 성인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구김 없이 잘 커줬습니다. 세상의 높은 기준으로 보면 대단하지 않습니다. 평범합니다. 그러나. 제 기준에서는 너무도 멋지게 자라주었습니다. 가족 간에 애틋하고 화목합니다. 세상에 나가서 상처받아도 집으로 와서 위안받고 편히 쉴 수 있는 그런 가정입니다. 저로서는 대성공입니다.
지금부터가 중요하겠지요. 앞으로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습니다. 제 원칙은 ‘불간섭’입니다. 그런 마음을 먹게 된 계기가 있지요. 큰 아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저는 아이에게 코딩을 공부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잠깐 권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불과 2년도 못되어 인공지능이 개발자를 대체하고 있지요. 커서 AI 같은 인공지능이 코딩을 대체합니다. 구글 전체 코딩량의 25%를 AI가 짜고 있고 앞으로 점점 더 늘어갈 거라고 합니다. 도처에서 개발자가 실직하고 있고요. 그걸 경험해 보고 결심했습니다. 이제 아이의 미래에 대해서 아빠인 나는 입을 다물어야겠구나. 자칫 아이가 오판하게 하겠구나. 오히려 방해만 되겠구나.
아이는 자라면서 점점 부모보다는 세상과 접하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젊은이는 본능적으로 ‘트렌디’하지요. 부모세대는 도저히 가늠조차 하지 못할 세상의 흐름을 본능적으로 따라갑니다. 부모는 그저 아이들이 가끔씩 지쳐서 돌아올 때 원기왕성한 에너지를 나눠줄 수 있도록 열심히 삶을 살아가고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세상을 멋지게 헤쳐갈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말이죠.
그래서 저는 ‘서퍼’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파도를 타는 진짜 서핑은 조금 훗날로 미루고요. 세상이라는 이름의 파도를 타는 ‘서퍼’가 될 생각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고정되지 않고 유연하게 변화할 줄 알며, 변화하는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는 '서퍼'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아이와 함께 험한 파도를 현명하게 타 넘으며 한 명의 동등한 서퍼로 아이와 마주 선다면 나이 들어서도 대화가 통하는 사이가 되지 않을까요.
그래요, 서퍼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