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시평 #37 옛 장마

친구는 툇마루에 사마귀처럼 누워서

by 정건우
사진 출처: 네이버


내 고향 강원도 양구는 사면이 천 미터가 넘는 고봉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따라서 여름은 찜통이고 겨울은 그야말로 냉동고나 다름없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반 변함없이 군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말 중에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란 말이 있다. 인제군 원통리의 엄혹한 자연조건을 빗댄 말인데 "그래도 양구가 있어 견딘다"라며 위안을 삼는다고 한다. 그 정도로 양구는 자연조건이 엄혹하다. 비와 눈이 많은 곳이 아니지만, 한번 온다 하면 그야말로 비상이다. 폭우와 폭설은 중학생 때까지 고향에 살았던 내 기억에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장마 시작 후 가장 많은 비가 그날 종일 내렸다. 나는 러 온 숙부님 댁 툇마루 기둥에 기대앉아서 날고구마를 먹으며 마당 한편에서 비를 맞고 있는 장독대를 보고 있었다. 잔잔하던 비가 갈수록 굵어지며 급기야 폭우로 변할 때까지 정신을 잃고 봤던 모양이다. 장독 뚜껑 위로 자욱한 물보라가 일어날 정도가 되니 집 주변 사방이 안개에 잠기고, 앞쪽의 숲은 어디론가로 날아갔는지 없고, 뒷산 어디가 무너졌는지 흙탕물은 봉당 앞까지 적셔대고, 급기야 나 마저 장독대 속으로 들어가면 내 주변이 온통 사라져 오로지 비만 남게 되는 찰나에 친구가 온 것이다.



지나다가 비를 피하자고 왔단다. 절친의 출현으로 깨진 적막이 못내 아쉬웠지만, 어디에 한 번 빠지면 정신을 놓고 사는 내 성질을 너무도 잘 아는 친구는 고구마를 집어 들더니 툇마루 한쪽에 누워서 내 감상을 방해하지 않았다. 나의 실성은 계속되었다. 어두워질 때까지 친구는 코를 골며 잤다.


그새 세월이 한 사십 년 넘게 흘렀을까?. 전국적으로 폭우가 쏟아지던 날 늦은 밤에 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쪽도 비가 많이 왔느냐고 묻는 안부전화였다. "야, 야, 그래도 옛날 장독대 두들겨 패던 그때 그 장마에 비하면 오늘 건 새발의 피야". 전화를 끊으며 전립선 크기나 한번 재보란다. 본인은 비대증으로 고생 중이라면서. 우리 나이엔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 최고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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