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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Dec 29. 2020

알고 보니 음식들

오트프리트 프로이슬러, 왕도둑 호첸플로츠 시리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12월은 맛을 장담 못하는 음식 만들기의 나날이었다. 늦은 김장(배추김치, 굴 겉절이, 새우젓 깍두기)을 치대  잼을 세 가지(, 블루베리, 사과)졸이고 팥죽을 쑤었고 만두를 두 번(김치, 부추)이나 빚었다. 멀티가 안 되는 기질상 이러다가는 글의 세계에서 점점 멀어질 것 같아 가볍게 <왕도둑 호첸플로츠>라는 동화를 읽기 시작했는데, 잡은 지 얼마 안 되어 눈이 무거워지더니 급기야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콩알, 깨알 같은 재미가 두루두루 있는 이 책을 읽으며 졸고 있다니... 아직 내 몸은 신체활동 모드에서 전환이 안되었나 보다.



느닷없이 아이들 어린 시절 추억이 묻어있는 오래전 동화를 꺼내 든 이유는  <내 식탁 위의 책들>이란 책을 보고 다시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종이 위의 음식들, 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주로 문학에 나오는 음식들에 관한 깃털 같은 사유로 더 많은 발견을 하게 한다. 본 대로, 먹어온 대로에서 여전히 머물고 있는 지금 내 식생활은 미식을 멀리 했던 아버지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하물며 책 읽기에서 특히 문학에서는 인물과 심리에 집중하기 바빴는데, 음식에 관한 대목은 좀 더 내용을 풍성하게 보조하는 장치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음식도 그 시대, 특정 지역의 문화이기에 충분히 이야기의 흐름에 한축을 담당할 수 있었고 하고 있었다. 속지의 문구 '먹는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당신'이 아닐지라도 먹방, 맛집이 대세인 요즘 읽는 이에게 흥미로울 가능성이 높을 내용이다. 어쩌면 먹고 싶은 음식보다 읽고 싶은 책을 몇 권 건질지도 모른다. 여러 챕터 중 탐식가의 식탁 편에 기발함과 재미로만 기억된 동화 호첸플로츠 이야기가 쟁쟁한 작품들 사이에 떡 한자리 차지하고 있었으니 도대체 무슨 음식이 나왔더라?? 기억을 탓하기보다 냉큼 책꽂이에서 뽑아오게 되었다.


그랬다. 독일 작은 마을이 배경이다 보니 다른 유럽 나라들에 비해 빈약하지만 독일 전통 집밥의 향연이다. 알고 보니 음식이 엮이지 않은 데가 없다. 1편에서 악명 높은 도둑 호첸플로츠가 카스페를 네 할머니가 애지중지하는 (돌리면 노래가 나오는) 커피 기계를 훔친 사건(할머니는 현장에서 기절함)도 그렇고 그 여파로 그토록 기다리던 할머니의 일요일 음식 거품 림을 얹은 자두 과자 손자 카스페를과 친구 제펠은 먹을 수 없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도둑을 잡아야 된다! 자두과자를 먹기 위해 아이들도 도둑잡기에 발 벗고 나서야 다. 호첸플로츠의 계략으로 사악한 마법사 츠바켈만의 머슴으로 팔려간 카스페를의 주된 노동은 딱 한 가지, 주인이 안 되는 마법인 감자 껍질 벗기기다. 수작업에서 해방된 츠바겔만이 아무리 먹어도 충분치 않은 감자 요리의 양은 점심으로 으깬 감자 일곱 그릇, 저녁으로는 양파 소스를 친 감자 경단 일흔여덟 개다. 거기다 감자튀김이 먹고 싶다고 감자 여섯 양동이를 껍질 벗겨 잘게 썰어 놓으라고 숙제를 낸 뒤 외출한 사이 카스페를이 지하 식료품실에 들어가 발견한 저장 식품들은 이런 것 들이다. 절인 오이, 마멀레이드, 탈지유, 살라미 소시지, 소시지, 햄.

2편에서는 붙잡힌 호첸플로츠가 갇혔던 소방서를 탈출해 또 카스페를네 할머니 집에 나타난다. 이번엔 할머니가 목요일마다 하는 구운 소시지를 곁들인 양배추 조림을 남김없이 뺏어 먹는다. 노래가 나오는 커피 기계의 진가를 알고 배고파서가 아니라 음식 맛을 훔치는 도둑이라니! 요 귀엽고 낭만적인 도둑은 카스페를과 제펠을 숲 속으로 포박해 가다가 빨간 버섯 열두 송이에 유혹 당해 또 자기 무덤을 파고 만다. 우리말로 그물버섯인 포르치니로 예상되는 빨간 버섯으로 만든 버섯 수프를 독버섯 수프로 사기 친 소년들의 꼬임에 걸려들어 포박을 하라고 자신의 몸을 내어 주는 상황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보헤미안 지방 출신 작가 오트프리트 프로이슬러(1923~ 2013)의 호첸플로츠 3부작은 독일 전통 인형극 <카스페를>에 뿌리를 두고 있다. 17세기부터 내려오는 유서 깊은 인형극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평범한 소년들이 사악한 마법사와 도둑을 응징하여 주변 인물들을 도우는 친숙한 이야기이다. 옛이야기의 주제인 권선징악을 따르지만 다시 읽어도 재미를 이토록 잘 구현한 동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유머와 위트가 가득한 그림과 각 인물들은 충분히 사랑스럽다.

다시 읽으며 음식을 재발견한 새로움이 있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내 마음을 사로잡는 건 노래가 나오는 커피 기계다. 어쩜 프로이슬러는 이런 생각을 했는지, 실제 독일에는 이런 제품이 있는지, 그라인더에 오르골을 장착하면 가능한지, 여전히 의문이지만 손재주 좋은 사람한테 의뢰해 만들어 볼까 늘 생각 중이다. 집에 고장 난 것들을 부품을 사서 고치는 재미를 알고 보니 의외로 가능한 일들이 많았다. 카스펠네 할머니 커피콩 가는 기계에서는 '모든 게 새로워라. 오월은'이라는 노래가 흘러 나온다. 그럼 내 기계에는 어떤 노래를 흘러나오게 까? 설마 카페인 중독을 부르고 좀도둑을 부르는 노래는 아니겠지??



지난 11월엔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통증으로 몸과 마음이 많이 다운되었었다. 회복되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숨 쉬고 있기에 움직이려 애썼고 그동안 게을리 했던 음식 만들기에 중해 보았다. 몸쓰기도 글쓰기만큼 중독성이 있어 꼬리에 꼬리를 물어 할 일이 계속 생겨났다. 몸이 피곤하니 잠이 달게 왔고 입맛도 돌아와 놀랍게도 동짓달 긴긴밤 12월이 훨씬 가벼워졌다. 오직 먹거리를 찾아 숲을 헤매던 야생의 기질이 살아나 몸을 회복시킨 것일까. 가장 개인적인 것이 세계적일 수 있는 것처럼 가장 기본을 향한 몸짓예측불허의 우주 같은 몸을 살릴 수도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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