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계영 Apr 01. 2021

프라하의 봄, 다시 봄

책으로 떠나는 세계여행/ 체코 편


아직도 '체코'라는 단어가 입에서 튀어나올 때는 습관적으로  '슬로바키아 '를 이어서 말해야 될 것 같습니다. 동구의 공산권 나라 '체코슬로바키아'로 학교 시절 각인되었기 때문이죠. 1993년 두나라로 분리되고 우리도 여행자유화 시대가 열려 유럽 여행지로 체코 프라하가 뜰 때  남들이 찍어온 블타바 강 카를교 사진만 봐도 심쿵하여 달려가고 싶었더랬어요. 오랫동안 닫혔던 문이 빼꼼히 열린 것 같아 호기심을 더 자극했나 봅니다.

정말 운 좋게도 프라하에 체류해 있는 지인의 지인이 초대해 실 같은 그 끈을 잡고 몇 년 전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첫 유럽 여행지가 뜻밖에도 프라하가 되어 오감하며 갔다 왔는데요, 소문난 잔칫집에 먹을 게 없는 게 아니라 많았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좋았어요. 중세 모습을 우직히 간직한 모습도 좋았지만 구시가지 곳곳을 걸어 다니며 팁 투어 할 때 그 감동을 잊을 수가 없네요. 팁 투어는 그곳에서 보헤미안의 삶을 사는 교민 여성이 진행하는 투어로 함께 프라하 시내를 걸으며 장소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고 헤어질 때 여행자들이 팁을 자율적으로 주는 방식입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관련 이야기를 들으니 약소국으로 핍박받고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과정이 어찌나 우리닮은꼴이던지 전율이 일 정도로 뭉클해져 지갑이 저절로 열리더라고요. 얼른 코로나 시대가 막을 내려 시청사 앞으로 정해진 시간에 나가면 양갈래 머리 그분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프라하 여행이 더 의미 깊었던 이유는 20대 초반에 본 영화 <프라하의 봄>에 대한 기억 때문입니다. 배경지식 없이 포스트 분위기에 끌려 본 영화라 모호한 내용만큼 특이한 영화 분위기가 낯설었지만 원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찾아보게 할 만큼 또 풍기는 아우라가 있었어요. 오로지 연애에만 관심 있었던 그 시절, 처음부터 니체 사상을 들이대는 소설의 무거움에 질려 완독은 물 건너갔지만요. 뜻밖의 여행을 다녀오고 영화를 다시 보니 프라하 곳곳이 보이고 그제야 인물들이 좀 오더라고. 책은 이번에 숙제로 받고서야 다시 읽게 되네요. 여전히 어려웠지만 그래도 세월이 좀 거들어 주는 것 같아 몇 마디라도 적어 보려 합니다.


부분적으로 이해한 것을 전체적인 흐름으로 넘겨 집자면 약소국의 고뇌하는 지식인으로 살았던 작가 밀란 쿤데라의 삶이 토마시라는 인물로 대변되어 누구나의 인생을 관통하는 무거움과 가벼움이라는 조화로운 모순에 관한 이야기,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대적 배경은 냉전시대 체코의 지도자 둡체크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슬로건을 내건 체코의 자유화 물결, 프라하의 봄이 소련의 침공으로 막을 내린 1968년 그즈음입니다.


먼저 무거움과 가벼움을 설명하기 위해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 나오는데요, 우리 삶에 빗대어 보자면 이번 생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변함없이 계속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패자부활전처럼 실패한 인생이라 생각되면 다음 생에 만회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도 있고 좀 더 낫은 사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무한이 주어지는 거죠.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 윤회사상이 떠올랐습니다. 좀 엉뚱하지만 쉬고 싶은데 자꾸 돈을 벌 수 있는 일거리가 보이는 상황도 연상되고요. 그러면 이렇게 반복되어 돌아오는 삶이 축복일까요, 불행일까요. 좀 더 지금을 잘 살기 위해 잡히는 미래를 제시하는 건 희망이자 현재를 무겁게 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늘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야 하니까요. 아니면 말고, 대충, 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 딱 한 번뿐인 우리 인생은 그래서 한없이 가볍다가 될 수 있겠지요. 인생이란 한낱 그림자 같은 것,  산다는 건 아무런 무게가 없어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 하다고까지 하네요. 한없이 가벼우면 자칫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끝'을 진정으로 인식한다면 오히려 반전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딱 한 번뿐이라 대충 살 수도 있지만 더 정성껏 살 수도 있다는 거죠. 큰 의미를 두지 않아 오히려 가볍게 부담 없이 맘껏 열정을 불태울 수도 있습니다.

모든 현상은 이렇게 이분법적이지 않아 섹스와 사랑을 구분하며 지극히 사랑하는 여자 테레자를 두고도 바람둥이 삶을 지속하는 가벼움의 상징, 토마시도 한편으로는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를 빗대어 당시 체제에 반하는 글을 기고해 감시 대상이 되기도 하지요. 무거움의 상징 테레자는 진지함을 추구하지만 불행이 그림자처럼 늘 따라다니고요. 토마시에 대한 자신의 집착을 알아차리는 순간은 삶의 끝자락입니다. 다른 인물 사비나, 프란츠의 삶도 자세히 보면 그렇습니다. 역사도 반복될 수 있다면 고통이 난무했던 어느 시점을 바로  세울 수 있겠지만 한 번이라 영원히 끝나는 것이라 했습니다. 역설적이게 희망이 없어 또 다른 희망을 품게 합니다.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다행인가요.

무거움과 가벼움이 공존하는 이 세상, 겉으로 한없이 가벼운 개인의 인생에서도 스스로 두 가지를 잘 변주할 수 있다면 굳이 다음 생이 필요할까 싶습니다.


다시 읽으며 거대하고 촘촘한 작가의 세계관을 영화로 만든 필립 카우프먼 감독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밀란 쿤데라는 19금 영화로 전락했다고 맘에 안 들어했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두께만큼 무거움이 가득한 원작을 새롭게 잘 해석한 멋진 영화였거든요.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마치 N극과 S극처럼 강한 끌림으로 시작된 토마시와 테레자의 첫 만남, 인생의  마지막 날( 함께 차를 타고 시골길을 가다가 전복 사고로 죽는다) 만족한 두 사람의 표정이 영원처럼 화면을 가득 매웠던 마지막 장면은 또다시 봐도 좋았습니다. 사노 요코의 백만 번 산 고양이처럼 자신의 모습으로 사랑할 수 있었기에 다시 태어날 필요 없는 그들이었지요.


로맨스 영화로만 착각하고 빨려 들었다가 맞닥뜨린 심상치 않은 분위기는 체코의 국민이었던 작가가 조국의 시대적 운명(무거움)에서 건져 올린 인생(가벼움)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었는데(아마도), 여전히 깊은 뜻은 잘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살고 나면 알 수 있을까요... 또 여전히 배우들에 머무르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이제는 은퇴한 다니엘 데이 루이스, 저는 이 배우를 넘는 멋진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주름진 얼굴로 여전히 활동하는 줄리엣 비노쉬, 수많은 아름다운 여배우들을 한 곳에 모아 놓아도 저에겐 돋보이는 배우입니다. 외모가 아닌 무언가가 분명 있는 사람 같습니다. 사비나 역을 맡은 레나 올린, 그냥 멋지고요. 무료 영화 카테고리에 있을 정도로 오래된 이 영화를 다시 보니 화면 가득 펼쳐지는 이 배우들 젊은 모습 앞에 그날 영화관에 몰려갔던 스무 살 그녀들까지 보였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꽃과 시, 노래 그리고 아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