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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Apr 24. 2021

아무도 읽지 않은 중고책

에리히 캐스트너 <내가 어렸을 때에>

1996년에 국내에서 초판 1쇄가 발행되었고 2000년 한 번 개정을 거쳐 지금도 여전히 발행되고 있는 책이다. 원서는 무려 독일에서 1957년에 나왔다. 독일 작가 에리히 캐스트너(1899~ 1974)의 자전적 이야기 <내가 어렸을 때에>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하늘을 나는 교실>이라는 동화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소설, 시, 평론, 희곡, 수필 등 글쓰기에 관한 한 남부러울 게 없는 탁월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폭격으로 하룻밤 사이 폐허가 되었다가 통일 후 재건된 도시, 독일의 피렌체, 드레스덴의 아름다움을 들이마시며 자란 사람이었다.


도서관에서 시공주니어 문고 시리즈 사이에서 발견하고 처음엔 심심풀이로 읽기 시작했으나 갈수록 책을 갖고 싶다는 열망에 오히려 집중이 안될 정도였다. 줄을 긋고 싶은 문장과 그냥 책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장면이 수두룩인데 보기만 해야 하니 안타까웠다. 새책보다 중고책이 사고 싶었다. 이렇게 좀 지난 책은, 더군다나 오래전 이야기가 담긴 책은 중고로 사는 게 어울릴 것 같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헌 책일지라도 분명 새 책처럼 깨끗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이 책에서 내 어린 시절의 이야기 몇 가지를 여러분에게 들려주려고 한다. 전부는 아니고 그중에서 몇 가지만. 그러지 않으면 내가 아주 싫어하는, 벽돌만큼이나 무겁고 두꺼운 책들 가운데 하나가 될 테니까. 더구나 내 책상은 벽돌 공장도 아니다. 게다가 어린아이가 겪은 일이라고 해서, 모두가 어린아이가 읽기에 적합하지는 않다! 이 말은 약간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맞는 말이다. 내 말을 믿어도 좋다.(p11)

작가 본인도 읽게 될 독자를 의식해서 인지 미리 단도리를 하고 있지만... 글쎄 어린이 독자를 잡는 데는 실패한 듯하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On이 아니라 Off 중고매장을 발품 팔아 찾아갔다. 위치를 출력하고 살금살금(의도하진 않았지만) 다가가 보았다. 멀찍이서 이 시리즈 특유의 하늘색 물결을 발견하고 조금 설렜는데, 한눈에 책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두권이나 나란히 꽂혀있다. 한 권을 뽑아 들었다. 표지 윗부분 색이 약간 바랜 게 세월의 흔적은 있지만 펼쳐보니 손길의 흔적은 예상대로 전혀 없다. 새책처럼 빳빳한 페이지가 어디에 눌러앉지 않고 스르르 넘어간다. 아이가 숨을 쉬듯이 책 읽기를 바라는 어느 어머니가 한 권씩 사는 게 감질나 시리즈를 왕창 사들여 났지만 아이는 제목에서 벌써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하늘을 나는 교실>이나 <에밀과 탐정들>이라면 모를까 <내가 어렸을 때> 라니, 내가 지금 어린데 누구 어린 시절 이야기가 궁금할 이유가 없었을 지도. 마당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인데 우리 집에 과일이 어디 있네! 소리치는 내 엄마나, 어느 동네 슈퍼에서 생수를 사며 마을이 이뻐요 했더니 뜨악하게 바라보던 어느 할머니나 지금 속한 시절이나 주변은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더군다나 가끔씩 방문해  뛰어놀았던 우리 할아버지 댁 주변 이야기도 아니고 저 멀리 상상도 안 되는 독일 드레스덴 어느 작가가 심지어 ‘나는 그걸 어렸을 때 이미 알 고 있었다’라고 대놓고 말하며 어리석은 어른들 세계를 빤히 쳐다보는, 어디서나 상황판단을 할 줄 아는 아이의 시선은 평범한 아이들에게 지루하기 짝이 없을지도 모른다. 평범하다 못해 좀 덜 떨어지기까지 했으나 늦바람이 무섭다고 갈수록 남의 인생이, 세상이 궁금해 책으로라도 풀고 있는 무늬만 어른인 나 같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렇다. 어른 아이 이야기는 아이 어른이 보는 게 균형이 좀 맞는 것 같다. 그러나...


아무도 읽지 않은 듯한 헌책을 만나고 보니 쓸데없이 독자에 대해 과도하게 생각하고 말았지만 이 책의 독자는 <머리말 없는 책은 없다>라는 기발한 제목으로 쓴 머리말, 첫 문장에 명확히 밝혔다.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그리고 어린이가 아닌 여러분!


반세기 전(지금은 1세기 전) 한 사내아이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어린 시절을 기억의 나라에서 빛 속으로 끌어낸 일이라고 에리히 캐스트너는 말한다. 그리스 전설에 나오는 오르페우스 이야기를 꺼내며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살려내기 위해서는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했던 것처럼 자신도 과거를 돌아보지 말아야 하는지 자문한다. 그리고 과거를 돌아보았다! 에우리디케는 사라지고 말았지만 에밀(애칭)은 다시 살아나 우리에게 다가왔다. 한 세기 전 드레스덴 알베르트 광장 주변 그저 그런 사람들 삶의 이야기를, 1914년 세계 대전과 함께 끝나버린 어린 시절을 들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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