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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May 11. 2021

뒤죽박죽 산의 5월

To 삐삐

안녕, 삐삐!

벌써 5월을 제법 지나고 있구나. 어린이들의 영원한 친구 말괄량이 삐삐… 뭐라고!? 그래서 널 5월에 불러냈냐고? 아니 아니, 그래서 널  부른 건 아니야. 오늘 동산에 갔는데 갑자기 네 생각이 나지 뭐야. 놀랍게도 너의 뒤죽박죽 별장이 떠올랐거든. 산이 완전 뒤죽박죽이었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그럴 수도 있더라고. 그래서 너한테 소개해 주려고. 호기심 많은 너라면 아마 여기를 좋아하게 될 것 같아. 아님 말고, 하하!

일단 한번 따라와 보렴.


이 조그만 동산은 나무들이 앙상한 겨울이면 드러난 능선에 걷고 있는 사람이 길가에서 다 보일 정도란다. 거기다 여긴 어느 종중의 선산이다 보니 관에서 관리를 전혀 안 하나 봐.  관리가 안된 조그만 산, 바로 뒤죽박죽의 시작이지. 큰 비나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꼭 나무들이 픽픽 쓰러져 있더라고. 작년 여름엔 오죽 비가 많이 왔니…그 여파로 지난겨울엔 얼마나 을씨년스러웠는지 몰라. 잎을 떨군 키 큰 나무들이 반은 서 있고 반은 쓰러져 있었거든. 고르지 못한 나무들이 서로 엉켜 있는 모습이 어찌나 괴기스럽던지 까마귀가 깍깍 울기라도 하는 날이면 완전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악의 땅이야. 어둠의 마왕이 변신하며 휙휙 날아다닐 것 같은 우우~~~~ 덜덜!


그래도 겨울이 가고 새순이 돋기 시작하면 마치 두 얼굴의 사나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숲도 착해질 채비를 하지. 요즘같이 초록에 잠기면 완전 딴 모습이 되지만… 이번엔 또 애벌레들의 천국이 돼. 잎을 갉아먹는 소리가 마치 가랑비 내리는 소리처럼 온 산을 뒤덮을 정도니까. 작년에 만난 애벌레들 함 볼래.. 송충이를 닮은 애벌레치곤 좀 이쁘지만 뭐.


애벌레는 애벌레, 거기다 배고픈 애벌레들이니까 얘들이 잎을 단박에 가루로 만들어 버려!

길바닥에 낭자한 바짝 말라가는 잎 조각들과 푸르디 못해 까매진 벌레 똥을 밟고 지나갈 때면 애벌레 털이 한가닥 들러붙은 것처럼 온몸이 스멀스멀 간지러워지기 시작해.


그런데 말이야, 올해는 이 애벌레들이 아직 안 보여. 음… 좀 더 기다려봐야겠지만, 대신 신기하게도 작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네. 쓰러진 나무들이 많다 보니 닿을락 말락 키 작은 터널이 곳곳에 생겨 특별한 장소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더라고. 잎들의 세력이 커지니 산길이 아늑한 초록 터널이 되어 조금 근사해져 버린 거야. 이것 봐!


심지어 요런 느낌의 조형물도

숲이 미술관이고 이것들은 그곳에 전시된 작품들 같았어. 쭈욱 걷고 싶은데 희한한 나무 조형물들 때문에 자꾸 가던 길을 멈추고 주변을 빙빙 돌게 되어. 얼기설기 누군가 나무집을 지으려고 시도한 듯 하지만 사실은 태풍과 비, 바람, 햇빛의 작품이지. 그런데 쓰러진 나무들 대부분이 무슨 종류인지 아니? 요즘 한창 벌들을 바쁘게 만드는 아카시아 나무들이었어. 쓰러진 둥치에도 무심히 꽃이 피어나 있었거든.

번식력이 강한 대신 뿌리가 깊지 못한 것일까. 어쩌면 뿌리로 말하는 나무들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땅에서 분리되었음에도 끝까지 꽃을 피워내는 아카시아를 보니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해 감탄사가 나오고 말았지. 삐삐야, 나는 오늘 실컷 아카시아 내음을 맡고 왔단다. 사실 목적은 그거였어. 이맘때 온 산에 스며있는 아카시아 향기를 만나러 뒤죽박죽 숲에 발을 들여놓았던 거지. 너의 뒤죽박죽 별장처럼 좀 정신은 없었지만 뜻밖의 풍경들은 계절의 여왕에게 초대받은 기분으로 만들어 주었고 영혼이 몽글거리는 시간이었지. 주위의 자연에는 우리가 상상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든 것이 살고 있다고 말한 린드그렌 선생님도 너를 이런 곳에서 탄생시키지 않았을까. 숲은 문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우리 눈앞의 숨겨진 세계니까. 시간여행의 무대이자 놀라움으로 가득한 곳이니까.


길가다 잠시 쉬는 의자도 여긴 자연물이란다. 요즘 어디에나 있는 그 흔한 벤치 하나도 여기는 없어. 그러다 보니 쓰러진 나무가 또 쉼터가 되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 관에서 관리를 받는 게 좋을까, 안 받는 게 좋을까. 숲의 생태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 <숲은 누가 만들었나>에 보면 나무들이 쓰러진다고 숲이 작아지거나 황폐화되는 건 아니라고 했어. 숲은 이런 죽음과 더불어 성장하기 때문이지. 새로운 나무 종류가 들어서기까지 다만 시간이 필요한데 바쁜 현대인들은 이런 면에서는 미래보다 현재가 중요해. 힐링에 필요한 정비되고 안전한 숲길만이 우선이지. 여긴 불행 중 다행으로 그런 세태를 살짝 비켜나 숲 생태의 ‘천이’ 지점을 지켜볼 수 있는 귀한 동네 동산이지.


아카시아, 떡갈나무, 쪽동백나무류가 많은 이 뒤죽박죽 산은 사람으로 치면 중년에 해당되는 거래. 이 곳에 소나무류가 빼곡했던 지난 시간을 보지 못했던 것처럼 지금 활엽수가 지나간 미래의 숲도 볼 수 없어. 우린 그저 활엽수 시대의 사람일 뿐이야…. 말하고 보니 활엽수 시대의 사람? 어쩐지 좀 멋지다 하하!

삐삐야, 닐슨 씨 데리고 토미, 아니카랑 놀러 와. 숨바꼭질도 나무집도 지을 수 있는 이곳은 일 년 중 지금이 가장 좋은 때란다. 이 나무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 옆 강아지랑 눈 맞추는 것도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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